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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미술관의 성과 속 : 리움의 개관을 지켜보며

윤난지

지난 10월, 국립 현대미술관과 짝을 이루는 사립 현대미술관으로 우리 현대미술의 역사를 만들어 왔던 삼성미술관이 리움이라는 새 이름표를 달고 개관하였다. 개관식에 참석한 나는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메인 로비를 살짝 빠져 나가 한적한 전시실에서 작품들을 조용히 감상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식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전시실로 몰려들면서 작품들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예술의 성전과 같은 화이트큐브가 속세의 부산함으로 오염(?)되는 순간. 미술관의 성과 속이 교차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오늘날 미술관의 역설이자 운명이다.

리움의 개관을 두고 회자되고 있는 무성한 이야기들은 결국 모두가 이러한 미술관의 두 얼굴에 관한 것이다. “미술관은 예술의 집이다. 그러므로 일상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 깨끗하게 보존되어야 하며 함부로 범접할 수 없도록 관람자와 관람시간을 제한해야 한다. 아니다. 미술관은 무엇보다도 공공의 장소다. 평범한 사람들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도록 모든 이에게 항상 개방되어야 한다...” 등등. 리움에 대한 가장 큰 불만은 접근의 어려움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 리움은 예약제로 한정된 관람인원만을 허용하고 있는데, 작품과 전시 공간, 그리고 주택가인 주변 환경의 보호를 위하여 이러한 관람제한의 불가피함을 해명하고 있다. 이는 ‘리즈(Lees) 뮤지움’이라는 개인 컬렉션 개념으로 미술관의 성격이 변화된 점에서도 기인하는데, 미술계에서는 주로 이러한 측면에 섭섭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 어느 것도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니며, 앞으로 얼마든지 변화의 여지가 있다. 리움 측에서도 서두른 개관 탓으로 아직 확립되지 못한 관람체제를 정립하여 앞으로 기획전도 하고 차차 전면 개방해 가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성급한 비판을 자제하고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여유도 필요하다.

이렇게 이견들이 충돌하는 리움의 안과 밖 모두에서 직시해야 할 것은 미술관의 성과 속 어느 것도 회피할 수 없는 미술관의 존재근거이자 또한 존재이유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은, 그 성스러움마저도 자본으로 만들어지는 동시에 또한 자본을 만들어낸다. 미술관은 자본주의 사회의 재현물인 셈인데, 공, 사립을 막론하고 미술관이 도시의 로고가 되고 전시는 스펙터클이 되는 현상이 이를 반증한다 (사립인 구겐하임 빌바오나 공립인 테이트 모던을 예로 들 수 있다). 미술관은 더 이상 개인 컬렉션의 저장소로도 무균상태의 화이트큐브로도 남아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축적된 자본이 그렇듯이 축적된 컬렉션 또한 필연적으로 공공의 차원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리움은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자본의 효과를 재현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나누는 자본의 윤리적 차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한편, 나는 이렇게 모든 것이 스펙터클이 된 대중사회 속에서도 여전히 예술의 ‘가치’라는 지점은, 그리고 그것을 수호하는 ‘성역’으로서의 미술관의 기능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는다. 프리드의 말처럼, 예술은, 그것이 주는 영원한 ‘현재’의 경험은 속절없이 가버리는 우리의 삶에 주어진 드문 은총(grace)이다. 따라서 무조건 미술관을 개방하라는 주문은 그것이 가져 올 전시장의 분위기를 배려하지 않는 무책임한 발상이다. 시끄럽게 떠들거나 뛰어 다니고 심지어는 작품을 만지는 관람객들, 특히 유람 오듯 버스를 대절하여 몰려들 단체 관람객들을 떠올리면 리움의 고민이 이해가 간다. 성전이자 공공장소, 이 모순을 껴 앉는 것, 그것이 어렵지만 풀어야 할 오늘날 모든 미술관들의 숙제일 것이다.


<미술관은 보여주기 장소

외국 유명 건축가들의 건물 그리고 모더니즘 중심의 현대컬렉션과 값비싼 전통컬렉션을 두고 포장도, 내용도 ‘명품’이라는 비난 섞인 표현이 회자되고 있다. 물론, 컬렉션의 영역을 비주류와 제3세계, 신진작가 등으로 열어야할 필요가 있으나, 소위 명품도 대중이 향유하여 진정한 의미의 명품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미술관을 단순히 전면 개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작품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전시장이 전시 또는 과시(?)의 장소이기를 그치고 교육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친절한 설명문은 물론 어린이 및 성인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관람자에게 다가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품의 내용 뿐 아니라 관람의 방법도 가르쳐야 할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애초부터 다양한 관람자 층을 염두에 둔 전시기획과 전시설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 때 서로 다른 가치들과 이해관계들을 어떻게 포용, 반영할 것인가가 관건이 될 것이다. 미술관은 ‘보여주기’를 위한 장소이며, 따라서 주인은 보는 주체 즉 관람자라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엘리트 문화가 폭력이 아닌 축복으로 읽혀지는 곳, 예술의 가치를 지키는 동시에 일반인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내가 꿈꾸는 미술관이다 (세 전시관 중 어린이 미술관이 그런 가능성을 가장 많이 보여주는 곳이었다).
이 모든 것은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이 무거운 짐은 우선 리움이 져야하겠지만 그 바깥 또한 그 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대책 없이 질타의 날만 세우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고 그 소중한 예술의 보고를 따뜻한 격려의 눈길로도 바라보아야 할 것이며, 생산적인 비판을 통해 그 행보에 동참하여야 할 것이다. 리움이 개인의 보물창고가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곧 우리 모두의 몫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이후 항상 투쟁의 대상이어 왔던 자본과 그 기호가 찬미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에 한 수를 둘 때도 되었다.

이제 우리도 세계적인 미술관, 그것도 동서고금이 한자리에 모인 독특한 미술관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일단 자랑스러운 일이다. 남은 일은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일이다. 문화는 나눌수록 커진다. 나는 그 소중한 보물들이 한사람 한사람의 눈을 통해 되살아나기를, 그리하여 머리와 가슴도 풍요로운 세상이 오기를 꿈꾸는 순진한 유토피안이 되어 본다. 리움의 문이 진정으로 열릴 날을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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