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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노화가는 구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황주리

며칠 전 이영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혁림의 ‘구십은 아직 젊다.’전에 갔었다.
아직도 그 기운이 정정하신 노화가의 모습이 너무도 보기 좋았다. 통영 바다가 물결치는 그의 새로운 화면에서, 나는 무릎을 탁치며 노대가는 구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는 말이 경구처럼 떠올랐다. 그가 나이 구십에 상업적 매너리즘을 넘어서 끝없이 투명에 가까운 거대한 바다를 발견했음은, 나이어린 후배 작가로서 심히 존경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어쩌면 구십에 그린 그의 거대한 그림들 앞에서, 지금 바로 이 시간이야말로 외롭고 오랜 화업의 길을 걸어온 화가 전혁림의 화가로서의 진정한 전성기임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혁림 사후 오랜 뒤야 말로 진정한 대가의 전성기를 누리는, 모든 화가들의 꿈을 그에게 실어보고 싶었다. 어쩌면 그것은 역으로 다른 대가들처럼 상업적으로 혹은 매스컴이나 비평의 지대한 관심을 일찍이 누리지 못했다는 점이 오히려 강점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노대가들이 제대로 대접받는 세상이 참으로 바람직한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들이 얼마나 척박한 예술 풍토에서 낙타처럼 고행의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휴머니즘적 이해가 아니더라도, ‘인생은 짧고 그 예술은 길다’는 오래된 진실을 간직하고 싶어서다. 이 세상은 날이 갈수록 대중의 눈길을 끄는 화려한 쇼 한 마당을 예술가에게 요구한다. 어디 예술가뿐이랴. 과학자도 예술가도 사업가도 가수나 배우처럼 화끈하고 재밌는 쇼 한판을 벌여주길 기대한다. 그렇게 어떤 기간 스타덤에 올랐던 연예인들이 세상의 스산한 한 줄기 바람처럼 사라지고 잊혀지듯이, 아니 그만큼 화려한 조명을 받지도 못했던, 끼리끼리나 알아주던 우리들의 노화가가 이 세상에서 까마득히 잊혀져가는 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사실 대중들은 그림에 대해 너무 무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젊은 미술학도들이나 미술 기자들조차 작고하신 풍경 화가 박고석이 누구인지, 우리 세대 미술교과서로 익히 알려진 추상화가 류경채가 누구인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자 추상의 대가 남관이 누구인지, 지금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중인 작고 화가 김영주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슬픈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중과 언론은 작고하신 그 노대가들이 대규모 회고전을 한다고해도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차라리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해도 사람의 눈을 자극하는 젊은 작가들의 쇼 한마당이 훨씬 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젊은 미술학도들은 설사 노대가들의 세계가 진부하게 느껴진다해도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를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손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 세상이 온다고해도, 오늘의 미술은 지구상의 모든 다른 것들처럼 과거에 빚지고 있음이다.





전혁림의 ‘구십, 아직은 젊다.’라는 전시 타이틀이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노대가가 구십에 그려낸 거대한 그림 앞에서, 민족주의랄지 우리 민화의 영향이랄지, 그 세계가 동양적인 것에 가까운지 서양적인 것에 가까운지 하는, 어떤 이론의 한계들을 뛰어넘는 빛나는 생명의 노래를 들었다. 지난 12월 16일 전혁림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심포지엄에서 열변을 토하던 평론가들의 이론보다 노화가 전혁림의 얼굴표정과 그림과 닮은 의상을 바라보는 일이 훨씬 더 유쾌했다. 이영미술관의 부관장인 김연진은 이렇게 썼다.
“그의 화면은 활동적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객을 삼킬 듯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화면에 펼쳐진 이미지는 마치 관람객을 바다에 초대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데 그 바다는 무한히 펼쳐진 공간이다. 따라서 필자는 충무항 혹은 한려수도라 이름 지어진 화면을 바라보면서도 충무항 이상의 바다가 가지는 무한성과 지역적인 바다를 벗어난 바다의 보편적 공간성을 경험한다.” 톡톡 튀는 젊은 그녀의 발언을 들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노화 가는 구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그 바다는 자신의 거울이며 고향인 통영의 바다라서 더욱 좋다. 만일 그가 구십에 그린 그림을 통해 자신의 고향 충무항을 넘어서는 끝없는 바다의 보편적 공간에 도달했다면, 그 공간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역사적 총체를 아우르는, 그래서 죽음까지도 무섭지 않은 노대가의 영혼의 노래, 생명의 노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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