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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니들이 게 맛을 알아?”

김석

몇 년전 “니들이 게 맛을 알아?” 라는 TV광고 카피가 유행어로 퍼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엉뚱한 햄버거 광고는 시청자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더불어 동 시대 예민한 아이러니(irony)정서를 담고 있다. 카피라이터가 만든 이 한 줄의 문구는 역설적 표현 때문에 해당제품의 호기심과 구매력을 동시에 극대화 시킨다. 대중매체 광고를 통해서 기호는 창출되고 결국 기호화된 광고는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아주 고도의 전술적 코드로 변환된다. 우리는 광고상품의 질과 양을 따지기도 전에 우선 광고를 통한 ’기호’를 소비한다. 장 보드리야르는 광고를 통해 기호를 욕망하고 소비하는 것이 현대의 소비사회라고 간파한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는 ‘나의 특수한 정체성과 특징을 잘 알고 있는가?’ 라고 빈정댄 듯 쏘아붙인다. 맛과 제품에 정말로 ‘차별성이 있다’라고 강조한다. 또한 ‘확실하게 잘 알지 못하면 아는 체 하지 말지어다.’ 라고 설득시키는 모양새다. 그렇다 “니들이 게 맛을 알아?”의 광고카피는 호기심을 유발하지만 타인이 알 수 없는 어떤 자긍심, 자격지심과 고집이 은연중 녹아있다는 뜻이다. 대학선배 J는 타인과 인사할 때 “조각가 노가다 정”이라고 소개한다. 조각가 정* 해도 되는데 ‘노가다’라니? 막노동판의 속어가 더 정감이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여러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노가다 화가입니다.”, “노가다 설치가” 보다는 “노가다 조각가”를 통해 조각 작품을 제작해 보지 않고 보기만 익숙해진, 도통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노동의 신화’를 제시한다. 가끔 “니들이 게 맛을 알아?”의 카피를 떠올리며 조각가들의 창작열정과 노고를 생각한다. 그러니까 “니들이 창작의 노동을 알아?” 혹은 “니들이 창작의 고통을 알아?”라고 몇 개의 단어를 고쳐 누군가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 들 때가 간절하다는 것이다.
조각 작품이 창작되는 과정은 대개 이렇다.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재료와 형태를 고민하고, 모형을 만들어보며, 이런 후에야 확대하여 입체물을 만든다. 화가와 다르게 조각가들은 늘 입체적으로 생각한다. 기성품(object)을 사용하여 구성(assemblage)하는 입체작품을 만들어도 역시 .생각처럼 간단치 않다. 조소과와 환경조각과 졸업생 대다수의 조각인들은 전적으로 노동의 고단함에 동의할 것이다. 그들은 노동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기쁨으로 맞이한다. 시지푸스 신화의 한 장면처럼 끝도 없이 공을 굴리고 매만지고 또 굴리고 매만진다. 꼭대기가 없음에도 말이다. 이렇듯 부단없이 창작을 하고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100 여 년 전 로댕은 “대개 처음에는 내 자식들에게 옷을 입히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전신형태를 누드로 만들고 그 후 분위기와 주제에 걸맞게 옷을 입혔다. 로댕은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적게는 2~3년에서 많게는 20여년까지 고독한 시간과 많은 노동력을 끈기와 인내로 갈음하였다. 회화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고 시간이 부족했음은 당시의 문제라고만 할 수 없다. 오늘날에도 역시 어떤 물체를 형상화시키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조각가들은 민감한 유행보다는 둔감한 느림의 아름다움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다. 유감스럽게도 생활패턴의 유행속도와 미술의 유행이 정 비례되는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우리네 미술판의 현실에서 조각가의 땀은 한낱 형이하학적인 ‘짠’ 맛에 불과하다. 이것뿐이랴 어떤 이들은 뉴욕 한복판의 미술흐름이 당장 이 자리에 서있지 않으면 왠지 현대미술을 하고 있지 않다고 성급하게 진단한다. 작금의 조각가들은 민감한 유행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진보와 전통속에 번민하고, 시대정신의 더듬이를 민감하게 들이대고 있다. 허나 비교논리에 의지해 협소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비평가들이나 미술관계자들은 ‘땀’의 짠맛을 어찌 설명할까?
<이것은 나의 편견일까? 간혹 기본적인 창작과정을 숙지하지 않고 글쓰기에 충만한 비평가들과 미술인들을 볼 때 “니들이 게 맛을 알아?”가 떠오른다. 현대미술의 진보적 논리는 머리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때로는 뜨거운 미술행위의 열정에 미술 그자체가 녹아진다. 그래서 인간의 다양한 감정에 호소하고 다양하게 감동하는 것 아닌가? 새로운 시점과 관점은 바라보는 주체가 인간의 심성이기 때문이다. 왼발의 전통과 오른발의 진보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미술은 보행한다. 이렇듯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의 미술방식은 오늘에 다시 표현되고 미래를 위해 제시되는 것이다. 현 시대 예술영역은 누구든 참여 할 수 있는 공적영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렇기에 누구든지 예술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힘들이지 않고 개념과 이념만 나열하여도 충분히 작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언제든 형상 없는 개념과 실체 없는 형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림자’가 좋다. 나는 지표면에 우뚝 선, 그리하여 촉각과 지각을 함께 느끼며 태양빛을 받아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동반한 입방체가 그립고 정감이 간다.
좀더, 땀의 형이상학이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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