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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인사동에서 만난 작가

박영택

아마도 지금 이때처럼 그날도 차갑고 바람이 불고 더없이 을씨년스러웠던 것 같다. 서늘하고 냉랭한 초겨울 오후의 인사동 풍경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당시 대학원 졸업을 앞둔 나는 선배의 소개로 조그마한 미술잡지의 수습기자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다. 관훈갤러리 앞에서 당시 편집장이셨던, 지금은 호암미술관에 계신 이준선생님을 만났고 그 분 밑에서 잠시 기자로 활동했었다.

1988년 겨울이었다. 잡지사는 몇 달 못 가 망했고 나는 얼떨결에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생소한 큐레이터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적잖은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인사동은 내 삶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직장생활을 했던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나는 거의 매일같이 이른 아침 인사동 어느 찻집의 한 구석에서 원고를 쓰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전시를 보고 작가를 만나는가 하면 점심을 먹거나 술자리를 옮겨 다니며 그렇게 삶을 소모시켰다. 요즘도 일정한 시간을 인사동에서 마치 의무처럼 보낸다.

그러는 동안 나도, 인사동도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이다. 그 사이 새로 문을 연 화랑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문을 닫은 화랑도 많았다. 빈번한 전시활동을 해왔던 작가들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는가 하면 생활고로 미술계를 떠난 작가, 제대로 활동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그만둔 큐레이터들도 부지기수다. 그들을 생각하면 웬지 우울하고 슬프다. 나만 비겁하고 구차하게 오래 살아 남아있다는 자괴감도 든다. <
얼마 전 한 전시장에서 민중미술을 하던 작가를 만났는데 반가운 마음에 우리는 악수를 하고 안부를 물었다. 그러던 중 그가 하는 말이 가슴에 와 박혔다.

“혼자만 잘먹고 잘살면 되겠어?”

운좋게 대학에 들어가 교수랍시고 월급이나 받아 먹어가면서 되지도 않은 글이나 써대며 원고료를 챙기고 그렇다고 열심히 공부한 성과가 나오는 것도 아닌 처지에 대한 신랄한 지적이다.

모두 다 맞는 말이다.

어렵고 힘들게 사는 작가들에 대해 아울러 우리 미술판의 여러 문제에 대해 마냥 침묵하거나 방조하는 입장을 보여온 나로서는 할말이 없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로서는 능력이 결정적으로 부재하다. 글쓰고 강의하는 일도 그렇고 전시를 기획하거나 이러 저런 일들을 벌이기에는 함량미달이란 얘기다. 그저 운좋게, 임기응변식으로 혹은 끊임없이 실수를 저지르면서 여기까지 피투성이가 되어 온 것 같다. 아는 이들은 다 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이러 저런 청탁이나 일들에 인간관계상, 혹은 턱없는 욕심에 끌려가고 말았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피해를 준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죄송함을 전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좀 침묵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오랜 시간 공들여 책을 읽고 생각을 가다듬을 절대적인 시간의 양일 것이다. 그 동안 너무 부박거렸던 것들이 모조리 가라앉고 그래서 그것들이 무거운 침묵과 짙은 그늘을 이루는 것을 마냥 바라보고 싶다. 말들이 모두 다 지워지고 쫓기는 시간의 흐름이 망각된 자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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