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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예술이 디자인과 다른 점

김신

어느 출판사 편집자가 들려준 일화 하나. 책을 한 권 출간하게 되어 그 표지 디자인을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북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표지 디자인을 완료했다는 디자이너의 전화를 받고 시안을 갖고 들어오라고 했다. 그런데 시안을 본 편집자가 크게 당황했다.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가 아니다. 표지 시안을 단 한 개만 해왔기 때문이다. 아니, 여러 개는 아니더라도 2개도 아닌 달랑 1개라니! 월급 받고 일하는 내부 디자이너는 평균 10개를 해오는데 말이지! 디자인해온 작품의 품질을 떠나 그 점이 아주 괘씸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만큼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뛰어난 디자인은 평범한 예술작품보다 예술적 가치가 훨씬 높다. 황홀할 정도로 미끈하게 잘 빠진 람보르기니 미우라를 보라. 아름다움만을 판단 기준으로 했을 때 이 자동차가 현대 조각보다 못할 게 무엇이겠는가. 또 1960년대 그래픽 스타일을 창조한 푸시핀 스튜디오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그린 삽화가 앤디 워홀이나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보다 못할 게 무엇이겠는가. 단언하겠는데,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기술로는 디자인과 예술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클라이언트의 의뢰로 일하는 것이 디자인이고 자발적으로 만들면 예술인가? 많은 이들이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를 이 점으로 설명한다. 만약 남으로부터 의뢰받아 만든 게 예술이 아니라면, 왕이나 귀족, 교회로부터 주문을 받아 창조된 서양 미술의 그 수많은 걸작들은 모두 예술이 아니고 디자인이란 말인가. 미술애호가였던 영국의 영화배우 피터 유스티노프는 이렇게 말했다. “보티첼리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보그> 잡지의 아트디렉터가 되었을 것이다.” 이 말은 오늘날 디자이너가 하는 일이 현대 예술가가 하는 일보다 과거의 예술과 더 유사하다는 뜻이다.

<디자인은 쓸모있고 복제된다
따라서 디자인과 예술의 다른 점이 아니라 디자인과 ‘현대’ 예술의 차이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과거의 예술은 오늘날의 디자인과 다를 게 없으므로. 자, 결론. 예술과 디자인이 분명하게 다른 점은 예술은 무용하고 디자인은 유용하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본질적으로 회사 로고나 화장실 사인, 냉장고나 TV, 카페의 인테리어, 아파트처럼 쓸모 있어야 한다. 그 쓸모라는 것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미의식을 충족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디자인은 대량으로 복제되고, 특히 기업 제품의 경우 많이 복제되면 될수록 좋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고 특별하며 괴벽스러운 취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디자인이 결정되면 그것은 공장에서 수천, 수만 개로, 때로는 수백만 개로 복제되어 팔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단 하나의 시안으로 할 수 있겠는가. 10개도 부족할 수 있다. 실제로 기업 로고의 경우 수백 개의 시안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예술, 아니 현대예술은 극소수의 사람, 예술품을 살 정도로 돈도 엄청 많고 예술 감상 경험도 많은, 예술에 관한 한 산전수전 다 겪은 까다로운 사람을 만족시켜야 된다.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감각의 극단을 맛본 사람이다.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 없는 맛의 달인을 어떻게 만족시켜야 할까? “시안 10개가 있으니 골고루 맛보시고 좋은 걸 선택해보세요”라고 할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예술가는 탈락이다. 예술가는 그가 쌓아온 내공으로 시안이 아닌 진품, 그것도 여러 개 필요 없고 단 하나로 승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대중이 뭐라 하던 감각의 극단을 맛본 단 한 명의 고수를 만족시키면 그만이다. 그래서 벌거숭이 임금님은 예술 감상자로서는 실패자다. 그는 최고의 아티스트들로부터 최고의 극단적인 퍼포먼스를 선물 받았다. 그러나 그저 보편적인 재미에 쉽게 만족하는 대중, 그것도 솔직한 꼬마의 한 마디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극단적인 감각을 맛보려면 절대로 ‘유용성’이라는 평범하고 지루한 필요를 포기해야 한다.

그 진리를 일찍 깨달은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무용한 사물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단 하나의 구실은, 우리가 그것에 강렬히 찬탄한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상당히 무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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