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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정희 고택

최열

김정희는 지난 해 서거 150주년 행사가 이곳저곳에서 열려 애호가와 지식인 사이에 존숭하는 분위기가 한껏 드높여졌다. 육중하면서도 날카롭고 강렬한 기운의 서예가이자 묵란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유홍준의『완당평전』덕분에 애호가가 급증했던 탓인지 행사장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것이다. 김정희를 존숭하는 이들은 그를 일세의 통유(通儒)라거나 금석고증학의 대가라고 하는데 그 저술이 빈약하여 유학사상가로 치기엔 적절치 않고 또 1817년 북한산에 올라가 신라 순수비임을 밝히고 빼어난 논문을 남겼지만 앞선 금석고증학자와 비교해 보면 업적의 무게가 어딘지 단순하다. 이런 존숭주의는 김정희의 참된 가치를 가로막을 뿐이다.





김정희는 1840년 6월 병조참판으로 위세당당한 고위관료였다. 음모에 밀려 8월 체포당했다가 어린 시절 벗인 우의정 조인영의 구원으로 죽음을 면하고 기약 없는 제주 유배를 떠나야 했다. 병조참판 시절 김정희가 살던 서울 집은 통의동에 있었다.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부마가 되자 영조가 딸을 위해 하사하고 그 이름을 월성위궁(月城尉宮)이라 지어주었거니와 여기에 대대로 살았던 것인데 그만 김정희 대에 이르러 몰수당하고 말았으니 유배가 풀렸어도 다시는 되찾지 못하였다.

7년의 제주 유배를 마쳤지만 이미 시대가 바뀌어 김정희는 더 이상 관료로 나갈 수 없었고 거처 또한 마땅치 않아 용산에 머물렀는데 이 때는 당대의 서화 감식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으며 재상인 권돈인을 비롯한 이들과의 교류로 권세가의 위신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2년의 유배를 겪고서는 희망도 버리지 않았을까 한다. 과천에 머물며 문득 찾아드는 손님을 맞이하며 살던 그 마지막 생애를 떠올리면 당당했던 월성위궁 시절이 더욱 안타까운데 거기 자라던 아람드리 백송(白松)이 너무도 그리웠을 것이다.

日雲미술연구소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6살 때 한학사대가로 명성 높은 박제가(朴齊家 1750-1805)에게 배웠다. 24살 때 생원시에 급제하여 연경(燕京)을 여행하였는데 이 때 청나라의 학자 옹방강을 만나 학예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34살에 문과 급제하여 승진을 거듭 형조참판까지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기나긴 제주와 북청 유배 시절 서예와 묵란에 전념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니 19세기 전반기 사대부 예원 최고의 작가 반열에 이르렀다. 그 명성은 당대보다 사후 더욱 눈부셨는데 오늘날 전문가는 물론, 대중 사이에 김정희를 경모하는 존숭주의자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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