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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전위미술의 역사를 불러내다

서유리

1970년대 개념미술을 시도했던 그룹 AG를 아는가? 세련된 모던함이 흘러넘치는 AG의 동인지를 볼 수 있는 전시가 있다. 경찰에 의해 20여점의 작품이 압수되었던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의 재기발랄한 전시 팜플렛은 어떤가. 신문의 해드카피와 만평만화를 차용해 정치현실을 날렵하게 풍자했던 이 팜플렛은 그 자체가 작품이다. 20세기 한국의 미술을 새롭게 이끌어갔던 미술가들이 벼락처럼 세상에 내놓은 선언과 발언을 담은 자료들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한국전위미술사: 영원한 탈주를 꿈꾸다》에서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서울 인왕산 자락 홍지동에 위치한, 작지만 깊이 농축된 역사의 공간이다. 모두들 정신없이 경제 성장에 몰두했던 1970년대, 김달진 관장은 좀처럼 주목되지 않았던 미술자료에 마음을 두었다. 작가의 사회적 삶의 기록인 전시도록과 동시대 미술 사건의 타임라인인 신문기사, 미술잡지들이 그것이다. 미술사 연구의 숨줄과도 같은 이 자료들이 모여 켜켜이 시간의 지층을 새겨놓은 공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과거의 미술들이 역사의 깊은 주름으로 단단히 뭉쳐져 있다가, 비밀스럽고도 화려한 퍼레이드로 자신을 열어내는 장소이다. 휘몰아치는 숨가쁜 속도의 서울, 그 한 귀퉁이에 미술의 기록들을 모아놓은 소중한 창고이자, 질주하는 속도에 역행(逆行)하여 과거의 미술에 마음을 기울여 작은 해방을 맛보는 공간이 이곳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다.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 팸플릿


좌) 《제1회 60년전》 리플릿
중) 《제2회 ZERO GROUP》전 리플릿
우) 《AG No.4》 정기간행물


전위(前衛). 아방가르드(avant-garde). 20세기 한국의 미술가들이 매혹되었던, 한동안 잊혀진 단어. 전위 미술의 퍼레이드가 미술자료박물관에서 말해지는 것이야말로 21세기적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쉬운 단언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전시처럼 전위를 줄기삼아 20세기 한국 미술의 지층을 열어 그 주름들을 펼쳐보인 예는 이제껏 없었다. 전시는 섬세하고 성실하게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사의 주요 지점들을 연결시킨다. 가장 멀리는 전위 미술의 역사적 시원으로서 1920년대의 언설들이 소환된다. 전시는 김복진과 같은 사회주의 미술가들이 매혹되었던 1920년대의 ‘신흥미술론’을 시작으로 삼고, 해방 이후 앵포르멜 유화를 덕수궁 담벼락에 시위처럼 걸어낸 ‘1960년미술가협회’의 야외전을 새로운 전위의 탄생으로 자리매김한다. 이어서 연탄과 같은 생활 사물을 전시장에 던져넣은 청년작가들의 실험미술이 혜성처럼 등장하고, 심층적인 이론의 개념미술로 무장한 ‘한국아방가르드 협회(AG)’가 모습을 드러내며, 한국 미술의 존재방식을 변이시킨 1980년대 민중미술 그룹 ‘현실과 발언’, ‘두렁’이 전대미문의 선언을 내놓는다. 한국미술을 움직인 핵심적인 전위운동의 생생한 언어들이 한 자리에서 숨가쁜 역사를 펼쳐낸다. 

전시장에는 어떻게 남아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희귀한 자료들이 많다. “우리의 작업은 실험, 무(無)에서 출발, 창조만을 위한 행동이다”는 짧고 단단한 선언을 던져놓은 ‘무동인’의 팜플렛(1967)에는, 한국 최초의 설치작품들 중 하나인 커다란 비닐백에 벌레고치처럼 들어간 작가의 장난스러운 사진도 같이 실렸다. 전시의 핵심 자료들은 선언문을 담은 팜플렛과 도록, 동인지이다. 이것은 전위 그룹 자신의 주장을 발화하는 중요한 매체들이다. 전위 그룹은 기존의 미술세계를 부정하는 새로운 시도를 언어로 선언함으로서 미술의 담론장에 자신을 가시화시키고 존재로 현현시키기 때문이다.

미술이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논설을 담은 자기선언의 매체들을 가만히 바라보면, 흥미롭게도 그 외모들이 당대의 경제적 형편이나 제작자의 디자인 감각들을 그대로 담아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60년전》 팜플렛은 전후(戰後) 10여년의 빈곤한 물자를 확인하듯 활자로 거칠게 찍은 얇은 갱지이지만, 1970년대 초반 한국아방가르드협회지는 해상도 높은 사진이 실린 묵직한 아트지 인쇄물이다. 선언하는 집단의 성격도 드러난다. 점잖은 AG 동인지가 풍겨내는 진지한 학술성은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전》의 가볍고 발랄한 신세대 감성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메시지뿐만 아니라 그를 담아낸 미디어 디자인 감성의 변화도 전위미술사의 한 부분인 셈이다.

때로는 미술사의 단계적 발전을 추구하면서, 때로는 미술제도 외부의 헤테로토피아를 꿈꾸면서 변이해나갔던 전위미술가들의 꿈은 오늘날 이미 실현된 것일까? 질문을 다시 해보자. 기존의 미술을 부정하고 새로운 미술세계를 찾아 자기를 혁신했던, 전위의 모험은 오늘날에도 필요한 것일까? 현재의 미술은 지금의 그것으로 충분할까. 

이 희귀하고 놀라운 전시를 기획한 김정현 학예사는 도록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위의 가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마치 서두의 질문―당신은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에 ‘네’라고 답하는 것과 같다. 그 의지는 엄혹하고 모순이 가득한 환경에서도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확률과 생명력을 동시에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말에 의하면, 전위는 ‘용기’이다. 21세기의 현재, 이 전시는 전위를 희망하고 그것을 용기로서 불러내려한다. 그것은 결국 내적 부정(否定)을 껴안으며 자기 존재를 긍정하는 삶의 용기이면서, 그러한 또 다른 나, 즉 타자를 향한 사랑을 감행하는 용기와 겹쳐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포스트모던하게 물질화되어 생동하는 정신의 힘이 메말라버린 현재를 직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전위를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전위는 사회나 미술의 역사적 진보를 향하기보다는, 인간의 근원적 마음을 회복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드는 전위가 될 것이다.



- 서유리(1973-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박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책임연구원. 한국의 20세기 미술사와 시각문화 연구자. 저서로 『시대의 얼굴: 잡지 표지로 보는 근대』(소명출판, 2016)와 『이탈과 변이의 미술: 1980년대 민중미술의 역사』(소명출판,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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