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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치열한 작가정신을 찾습니다

윤범모

정말 작가다운 작가를 만나고 싶다. 작가다운 작가의 덕목은 무엇보다 치열한 작가정신의 소유자이다. 치열함보다 우리네의 삶을 생기발랄하게 하는 것이 또 있을까. 신년 연휴에 나는 제주 일출봉 동네에 갔다. 성산포 언저리의 두모악갤러리를 찾은 사람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성자처럼 보였다. 그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말이 필요 없었다. 침묵의 소리, 그 소리 없는 천둥소리에 가슴 깊이 감동을 껴안고 있는 듯 했다. 두모악은 무엇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가. 제주도의 후미진 곳에 위치한 조그만 폐교, 그것을 전시장으로 꾸민 곳, 그곳의 매력은 무엇인가. 바로 작가정신이다. 그 치열한 작가정신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신정 연휴까지 봉헌하는 것이리라. 

 

치열한 작가정신의 사진가. 그는 너무 가난했다. 부여 출신임에도 제주 사람보다 더 제주를 사랑했다. 20년 이상 고향 땅을 밟지 않고 오로지 제주의 자연에 파묻혀 카메라와 씨름했다. 바다, 중산간, 오름 등 제주의 변화무쌍한 자연은 치열한 작가정신에게 조금씩 비밀의 문을 열어 주었다. 부양가족도 없으면서 그는 자신만의 의식주조차 제대로 해결할 수 없었다. 밑바닥 수준으로 연명하면서 오로지 카메라만 매고 매일같이 제주의 자연을 탐구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던 그는 유일하게 고독만이 벗이었다.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진실만이 최선이었다. 고향의 형제가 찾아와도 거처로 안내하지 않았다. 너무 누추하여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사진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고독한 작가, 하기야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정치꾼과 장사꾼은 사람 많은 데를 좋아하고, 진정한 예술가는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그렇다. 예술은 고독의 성과물이다. 치열한 고독. 고독하지 않고 어떻게 예술작품을 만들려 하는가. 제주의 자연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작가, 연륜도 어느 정도 쌓였고 또 명성도 얻을 길목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 무슨 날벼락인가. 육신은 고목처럼 굳어지고 드디어 카메라조차 들 힘도 사라졌다. 루게릭병, 현대의학에서 조차 포기했다는 희귀병에 걸려 고통의 세월을 안아야 했다. 투병생활 6년, 작가는 이승을 떠났다. 그의 뼛가루는 그가 갈고 닦은 두모악갤러리의 마당에 뿌려졌다. 치열한 작가정신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떠난 사진가, 그의 이름은 김영갑이다. 

 




 

김영갑(1957-2005), 그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면 나는 괜히 죄지은 것처럼 불안해진다. 1990년대 초, 그가 건강하게 제주의 자연을 카메라에 담을 때, 나는 그의 안내로 제주의 대표적 오름을 함께 답사한 추억이 있다. 정말 행운이었다. 과묵했지만 온몸으로 담은 치열한 작가정신은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았다. 뭔가 도움을 주어야 할 텐데, 그런 생각만 가지고 있었지 나는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세월만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김영갑은 너무 일찍 우리들의 곁을 떠났다. 그가 떠난 이후 나는 제주에 가면 할 말을 잃는 죄인의 신세가 된다. 고해성사하듯 나는 두모악갤러리를 조용하게 찾는다. 이번 신정 연휴에 가족과 함께 또다시 두모악을 찾았다. 예전보다 관람객이 더 많아진 듯하여 내심 흐뭇했다. 두모악에서 얻은 환희심은 제주의 서쪽 저지예술촌에서 무너졌다. 거기 제주현대미술관에서 원로 화가라는 이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유명 관광지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들, 작가정신은 물론 개성적 화풍이나 풍경의 독자적 해석이 부재한 ‘이발소 그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화가의 약력을 보니, 나로 하여금 분노를 치솟게 했다. 대학교수, 심사위원장, 조직위원장, 미술단체 이사장, 예술원 회원, 훈장 서훈 등 세속적 영화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작가정신과 무관한 얼치기 화가에게는 세속의 부귀영화를 듬뿍 안겨주고,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다간 작가에게는 궁핍과 요절만을 안겨 준 세상, 이런 세상에게 나는 화가 치밀었다.

 

김영갑은 사진학과 혹은 미술대학 출신이 아니다. 아니, 그는 대학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박수근과 같은 독학의 가시밭길을 통과했다. 그것은 진정한 작가정신을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치열한 작가정신, 미치지 않고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미친 사람들만 살아남는다(Only the paranoids survive).” 미국의 인텔 회사 입구에 써 있는 말이다. 미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하물며 미치지 않고 어떻게 예술작품을 만들려 하는가.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고 어떻게 미칠 수 있겠는가. 오늘도 서푼어치의 출세를 위하여 거리에서 헤매고 있을 이른바 예술가들, 그들의 서글픈 초상을 보고 나는 절망한다. 김영갑의 부재가 더욱 커 보이는 작금의 미술계 현실이다. 김영갑이 남긴 자전적 에세이 『그 섬에 내가 있었네』가 더욱 소중해지는 오늘이다. 그래서 나는 외친다. 치열한 작가정신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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