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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출품작을 지웠던 재일화가 송영옥의 회고전

윤범모

송영옥, 여자마술사, 1960,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어두운 공간이다. 아니, 뭔가 처절한 공간이다. 높은 담장 위로 오르려는 사람들의 손. 하지만 두 손을 움직여 봐도, 아등바등 허우적거려도, 굳건한 시멘트 구조물의 위로는 오를 수 없다. 처절한 상황이다. 손가락만 보이는 담 뒤의 높은 벽, 그암흑의 침울한 벽은 마냥 높기만 하다. 그벽에 붙어 있는 사다리는 낡아 하단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역시 처절한 절망의 순간임을 상징한다. 단순 구도의 유화작품, 하지만 상징성은 매우 높은 작품이다. 바로 송영옥의 <작품 69>(1969)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송영옥은 한동안 ‘절망의 벽’을 주제로 하여 제작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어두운 공간 안의 낙담한 사람<문짝>(1966), 높은 차단벽 같은 구조위에 얼굴만 내민 <마스크>(1971), 벽면틈새로 밀집되어 내민 고통 받는 얼굴들<벽>(1973), 해골 <작품>(1972), 그리고선박의 둥그런 창문 안에 스치고 있는 얼굴과 손바닥 <갈림(귀국선)>(1969). 처절한 상황의 인간 실존 문제가 담겨 있고 재일동포의 어려운 삶이 담겨 있는 풍경들이다. 이 작품들은 1960년대 재일동포의 평양행 즉 북송선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이기도 하다. 작품<갈림(귀국선)>은 북송선을 타고 평양행을 선택한 사람들을 다루었는데, 그 배는 무채색이고 사다리까지 부서져 있다. 정치 사회적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사실 이런 상황은 인간 실존의 본질적 문제이기도 하다.


송영옥, 작품 69, 1969, 광주시립미술관 소장 하정웅컬렉션


송영옥(1917-99)은  제주 출신으로 식민지 시절 도일하여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이후 몇 차례 귀국을 시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재일’ 화가가 되었다. 북송선을 탄 조양규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독자적 예술세계를 이룩한 화가라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조용했고 무엇보다 성격이 ‘온순’했다. 정치 사회 문제를 작품 주제로 즐겨 선택하면서도, 그러니까 재일동포 문제 이외 남북 분단문제 혹은 원폭 문제 같은 무거운 주제를 작품에 담으면서도 사실 송영옥은 ‘알부남’(알고 보니 부드러운 남자)이었다. 목소리도 작고, 과묵에 가까울정도로 조용한 성품이었다. 나는 말년의 송 화백과 가깝게 지낸 인연이 있다.

나는 도쿄의 송 화백 집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가난한 동네의 아주 조그만 집이었다. 부인과 사별하고 옹색한 살림을 살았다. 사실 우리 둘이 다다미방에 앉으면 무릎이 닿을 정도로 작은 방이었다. 화가는 이 단칸방에서 침식을 해결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어떤 때는 쌀독이 비어 있어, 내가 채워주고 오기도 했다. 가난한 화가의 표상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또 작품 숫자가 많은것도 아니었다. 그는 전시 출품한 작품을 지워버리곤 했다. 송영옥은 완성된 작품을 전시에서 발표하면 일단 그것으로 작품의 사명은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이런 습관은 가난함 때문에 시작되었다.

캔버스를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가의 입장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마지막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영옥의 유작은 많지 않다. 송영옥은 미술작품의 상품화를 극도로 꺼렸다. 완성작 지우기는 자연스럽게 그의 철학으로 발전되었다. 미술작품의 고가 상품화 추세의 현대사회와 역행되는 행동이다. 현재 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에서 ‘송영옥 탄생 100년-나는 어디에’ 특별전(7.6-9.17)이 개최되고 있다. 작가 생전의 회고전 개최는 불발되었지만, 위대한 화가 송영옥의 예술세계를 재확인할 수 있는 감동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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