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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제주민속을 향한 사무치도록 고독한 짝사랑. 제주민속박물관장 진성기

윤태석

제주도는 인구대비 박물관·미술관(이하 박물관)시설이 가장 밀집한 지역이다. 국민의 삶의 질 향상, 주5일제 근로 및 학교 수업제 정착. 고도의 자치권이 보장된 특별자치도 출범(2006.7), 유네스코와 세계문화유적보호재단(The New 7 Wonders)으로부터 ‘세계자연유산’ 등재 2007)와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2011), 중국 경제성장에 따른 국제 관광활성화, 일본인들의 지속적인 유입 등은 제주 박물관 확충의 촉매제가 되고 있다. 

현재 100여 개 관이 넘는 제주박물관의 시원에 제주민속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진성기(秦聖麒)선생이 1964년 6월 22일에 설립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박물관이 20개 남짓이었다는 사실에서 볼때, 매우 이른 것이었다. 특히, 민간에 의한 사립은 보화각(葆華閣, 1938, 간송미술관의 전신, 서울 성북동)과 한독약사관(1964.4, 한독의약박물관의 전신, 서울 상봉동. 1995.10충북 음성으로 이전) 2관 뿐이었다는 점, 이들 관의 설립주체가 기업 또는 재력가라는 점, 또 수도서울에 설립하였다는 사실 등과 비교하면, 28세 청년의 힘으로 제주도에 문을 연 것은, 최초의 사립 민속박물관이라는 의미까지 더해져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진성기 관장, 삶의 발자취
진성기 관장은 제주에서도 벽지로 꼽히는 북제주군 한경면 고산리에서 소작농 아버지와 해녀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 선생이 세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육지까지 나가 물질을 해야 했다. 일 년의 반은 조부모 밑에서 자란 진 선생은 7세가 되어 외조부가 훈장으로 있던 서당에 나가한학을 공부했다. 1948년(13세, 고산초등학교 6학년)에 발생한 제주4·3사건은 ‘미신타파’와 ‘신생활운동’으로 그 양상이 전개되면서 어린 진성기에게도 전통의 것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체감하게 했다. 어머니가 자주 불렀던 물질 요(謠), 조부모가 들려주셨던 설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어머니가 자식교육을 위해 제주시로 이사한 후 오현중학교(제주시 화북1동)에 진학한 진 선생은 방학이면 보다 많은 사람들을 통해 향토민요와 전설을 수집할 수 있었다. 제주방언과 민속자료에도 차츰 관심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제주대 국문과를 선택(1960)하게 되고, 본격적인 공부가 시작되었다. 1학년, 시인으로도 잘 알려진 양중해(梁重海) 교수의 국문학 강의는 전통에 대한 학술자료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진 선생이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민속조사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출간한 처녀작이『제주도 민요』제1-3집[2-3은 가제본 형태로 선 출간 후 77년에『남국의 민요』로 정식 출판(정음문고161)]이다. 연이어『제주의 속담』제1-2집도 펴냈다(2집은 가제본 형태로 출판). 이때가 진 선생 대학 3학년(1958)때였다. 이듬해에는『제주의 설화집(제주의 전설)』을 냈다(1981년 교학사에서『남국의 전설』로 재판). 이후 대학 졸업 때까지 무속, 무가(巫歌)집 등 4권의 저서가 더 나왔다. 재학 중 향토민속발굴 보존 및 집대성한 공로가 인정되어 졸업 시 학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제주민속박물관 본관

이렇듯 진 선생은 지금까지 제주의 민요, 설화, 무가, 신화, 전설, 속담, 수수께끼, 향토음식, 방언 등 제주민속과 관련한 총서 30여 권을 냈다. 실로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진 선생은 대학졸업 후 5년여를 더 준비한 끝에 450여 점의 자료를 토대로 박물관을 설립(제주시 건입동 1222번지)했다. 이후 모 독지가의 후원으로 삼도동에 23평 건물을 마련해 이전했으며(1965.2.7) 그 이듬해에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을 거쳐 국립민속박물관에 200여 점을 시작으로 유관기관에 총 1,150여 점의 자료를 기증해 제주의 전통을 저변 확대하는데 앞장섰다. 한편 66년에는 보다 안정된 연구를 위해 박물관 부속으로 제주민속연구소를 설립했으며, 제주도문화재위원으로도 위촉되었다.


시련의 극복, 그리고 폐관
진 관장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위기도 있었다. 1969년 6월 박물관 부지를 제공했던 독지가가 부지를 매각하면서 소장품의 소유권까지 빼앗아 박물관이 통째로 사라지는 신세가 되었다. 와신상담, 3천여 점의 자료를 다시 수집해 제주시 일도2동 996-1번지에 대지 667평을마련해 100여 평의 새 건물을 지어 재기했다. 또한, 1978년 4월에는 제주도지사로부터 제주도립민속자연사박물관(현 제주특별자치도민속자연사박물관)의 건립부지로 수용되었다는 철거령이 떨어졌다. 이를 막기 위해 한국민중박물관협회(한국박물관협회 전신), 한국문화인류학회 등이 적극 호소에 나섰지만 결국 1979년 2월 22일 수용되어 헐리고 말았다. 두 번째의 위기를 맞은 셈이다. 아무런 힘이 없던 진 관장은 망양지탄의 심정으로 우여곡절 끝에 같은 해 6월 22일 제주시 삼양2동 2505번지에 이전·재개관했다. 결국 대법원까지 간 소송에서 최종 승소(1981.2)했지만 이때는 이미 원상복구가 불가능하게 된 후였다.

현실을 한탄할 수만 없었던 진 관장은 평정심을 찾고 박물관 안정화에 매진했다. 84년에 개관 20주년을 기념한 ‘무구 특별전’, 94년에는 30주년 기념 ‘연물(演物) 특별전’을, 개관 35년이 되던 97년에는 ‘무속제(巫俗祭)’와 ‘제주민속유물시조전’을 2001-03년에는 ‘제주무신궁 큰굿’을 재현·개최했다. 그리고 개관 50년이 된 지금 소장 자료는 3만여 점으로 늘었다. 진 관장은 지난 7월, 마침내 숭고한 결정을 했다. 모든 자료를 모교인 국립제주대학교에 무상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제주민속의 응집체 제주민속박물관은 금년 말로 문을 닫게 된다. 그토록 사무치게 제주민속을 짝사랑했던 진 관장의 열정도 역사의 향기로 남게 된 것이다.

그의 말대로 진성기는 박물관을 통해 “웃자라기 쉬운 가지(신세대와 현대문화)를 고목(제주 전통)에 접붙이는 거간꾼 노릇”을 해왔다. 그 과정은 가시에 찔리고 쫓겨나고 좌절하고 인내하는 질곡의 여정이었으며 기구하게 억눌려 살아온 제주민의 수난의 역사와 유사하게 오버랩 되고 있다. 진 관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저에게 박물관은 ‘우리 뿌리의 집’이다. 이번 기증으로 제주민속 뿌리의 집(박물관)이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아쉽다. 그러나 평생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왔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어 가볍다.”고 말했다. 그가 그토록 즐겨 쓰던 ‘향기’는 제주민속의 원형을 살려온 진 관장의 험난한 역경이 밑거름이 되어 높고도 널리 흩날리고 있음을 보는 순간이었다.



진성기 관장


- 진성기(1936- ) 북제주군 한경면 출생, 국립제주대 국문과 졸업, 미국 뉴니언 대학 명예 사회학박사, 제주민속박물관 설립(1964.6.22.). 저서『제주도 무가 본풀이 사전』,『제주도학 개설』등 30여 권, 국무총리상, 제주도문화상, 일붕문화상, 문화관광부장관상, 노산문화상, 외솔상, 옥관문화훈장 수훈, 문화공보부 문화재전문위원 및 한국무속학회 고문역임, 국립제주대 박물관 4개 기관에 유물 기증, 국립제주대학교박물관에 3만여 점의 박물관 전체 소장 자료 무상기증(2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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