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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물관에 잠들다, 최순우

윤태석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 집무실에서


12월은 미술사학자 혜곡(兮谷) 최순우(崔淳雨, 1916-1984)선생이 이승과 이별을 고한지 만 30년이 된다. 혜곡의 본명은 희순(熙淳)이다. 그의 고향마을의 이름을 잘 버무린 아호 혜곡과 필명 순우는 50년대 중반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이 지어준 것이다.

혜곡은 다섯 살 때 큰형에게『천자문』을 배우고 이듬해에는 서당에서『동몽선습(童蒙先習)』을 익혔다고 한다. 보통학교에 입학했던 일곱 살에는 역시 큰형에게『사서삼경』을 배웠다. 보통학교 2학년 때에는 김기창(金基昶, 1913-2001)이 이웃에 이사 오면서 평생 우정을 나누는 계기가 된다. 보통학교를 나와 5년제 송도고등보통학교(이하 송도고보)에 진학한 혜곡은 유명 일간지에 시를 발표하는 등 발군의 글솜씨를 보이기 시작한다. 동네에서 작은 대서소를 운영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혜곡의 집은 가난했다. 집안사정을 잘 알고 있던 혜곡은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새로운 진로를 고민해야 했다. 이 무렵 개성부립박물관 고유섭(高裕燮, 1904-1944) 관장을 만나게 된다. 우연히 박물관에 갔을 때, 일본인들에게 문화재를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던 고유섭으로 인해 박물관에 대한 잔잔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경성제국대(서울대 전신)에서 미학을 공부한 후 조선인 유일의 박물관장이 된 고유섭에게는 자신의 뒤를 이을 박물관 전문가가 꼭 필요한 시점이었다. 송도고보 졸업반(1934)이던 늦가을 어느 날 관사에서 고유섭과 혜곡이 마주 앉았다. 혜곡에게 한문 실력과 글재주가 있다고 판단한 고유섭은 박물관 일을 배우도록 적극 권했다. 며칠 뒤 결심을 굳히고 다시 찾아온 혜곡에게 고유섭은 재차 물었다. “희순군! 자네가 가야할 이 길은 돈과는 거리가 먼 아주 고된 일이라네. 나중에 포기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예. 가르침을 주신다면 끝까지 해보겠습니다.” 특유의 차분한 음성 속에는 담대한 의지와 확신이 담겨있었다. 박물관을 통해 한국 미술사를 잇는 두 거장의 인연이 시작된 순간이다. 그리고 혜곡은 죽는 날까지 이 약속을 지켜냈다.

간송 전형필선생 가족과 함께(1955년 9월, 광릉)
뒷줄 좌측부터 최순우, 전영우 현 간송미술관장

오늘 혜곡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까? 먼저, 그는 따뜻한 인간애의 소유자였다. 박물관 사람들에게 혜곡은 정이 많은 이로 기억된다. 후배들에게는 특히 후덕했다. 암사동에서 발굴을 함께하던 젊은 관우(館友)의 어린 아들이 급성 복막염이 발병해 자칫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급보를 듣고 서슴없이 수술비를 쥐여줬으며, 결혼을 앞둔 젊은 학예사에게는 박물관(현 국립민속박물관) 로비를 식장으로 꾸미게 하고 주례를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 박물관의 어려운 형편에도 학예사들에게 유학의 기회를 마련해주는 등 후진양성에도 힘썼다고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필자에게 회고했다. 간송미술관의 권위를 이어가고 있는 최완수 실장을 간송으로 보낸 것도,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도자기전문가의 길을 걷게 한 것도 혜곡이었다.
또한 그는 폭넓은 교류로 인문인상(像)을 보여주었다. 특히, 전형필, 오세창, 고희동, 이경성, 김환기, 김기창, 장욱진 등 당대 문화예술계 최고의 거장들과의 교분은 특별했다.
“순우 존(尊)형 눈이 내립니다. -중략- 뭣 때문에 이런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살고 있는지 나도 모를 일…” 뉴요크(뉴욕)에서 김환기(경향신문, 1963.12.30일자 5면). “애정보다 더 소중한 것은 우정이다. 혜곡은 84년 세상을 뜰 때까지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경성의 회고(경향신문, 1999.5.14일자 30면). 혜곡과의 숙성된 교감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최순우와 아내 박금성과 성북동 집에서(1976년 봄, 현 최순우기념관)


사물을 바라보는 독창적인 자기 관점이 분명했다는 점도 혜곡의 됨됨이로 기억된다. “-전문생략- 동양 난과 서양 난이 모두 향기롭고 아름답지만, 그 미의 방향이 다른 것처럼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는 각자의 개성에 따라서 또는 그 태어난 핏줄과 환경에 따라서 제각기 아름다움을 꿰뚫어 보는 관점과 색다른 조형의 아름다움을 지어낼 수 있는 창조력을 지니는 것이다.”(박물관신문 기고, ‘젊은 관우들에게’, 1974.8월호) 혜곡은 이러한 태도로 우리 미술의 미학적 가치를 정립하고자 했으며, 후학들에게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도록 한사코 강조했다. ‘욕심이 없고 담담하며 대범한 그리고 기름지기보다는 오히려 가난한 아름다움이 더 빛나는 것.’(*경향신문, 1982.3.20일자 6면)으로 우리 미술의 개념을 정의한 것은 좋은 예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주목게 하는 것은 박물관인으로서의 폭넓은 전문성과 공심적(公心的) 태도이다. 1962년부터 혜곡과 함께 일했던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박물관에 살다』(2009년 동아일보사 발간)를 통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혜곡은 안목이 매우 뛰어나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자문이 오곤 했다. 물건을 보면 미추(美醜)를 금방 판단할 정도로 천부적인 자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관계에도 해박했습니다. -중략- 그분이랑 같이 있으면 자연히 그런 것에 귀와 눈이 트이게 되는 거죠.”
또 정양모는, 다른 학자들이 어려운 논문이나 연구서에 치중한 것에 반면 혜곡은 대중에게 우리 미술을 알리고자 노력했다고 말한다. 이는 혜곡의 박학다식과 대중을 향한 애민적 견지를 보여주는 단면으로, 그가 동시대 많은 인사와 폭넓은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 기인함을 알게 한다.
혜곡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 미술에 대한 그의 또 다른 표현 ‘조촐한 샘터에서 소리 없이 솟아나오는 맑고 담담한 샘물처럼 맛은 싱겁고 헤식은 듯도 싶고 때로는 고향의 냉수 맛처럼 잊을 수 없는 순정과 같은 자연스러움’(앞의 자료 *과 같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임을 그는 알고 있을까? 혜곡이 우리 곁을 떠난 지 30년, 박물관에서 맞이하는 이 겨울이 유달리 따스해지는 이유이다.



- 최순우(崔淳雨)(혜곡(兮谷) 1916-1984) 경기도 개성 출생. 호수돈(好壽敦)여고 강사, 1934년 개성부립박물관 업무 시작. 1946년 개성부립박물관 참사, 1948년 국립박물관으로 전근 후 보급/미술과장, 박물감, 수석 학예연구관, 학예연구실장을 거쳐, 1974년 내부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용, 1984년 관장 재임 중 지병으로 별세. 국내 최초의 도요지발굴단 사업추진. 1979-1981년 〈한국미술 5천년〉추진, 1945-1949년 문학동인지『순수(純粹)』(주간), 1967-1984년 문화재위원회 위원, 1962-1965년 한국미술평론인회 대표, 1965-1966년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1976-1980년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 등 역임. 고려청자와(靑磁瓦) 등 도자기와 목칠공예관계의 수십 편의 논문 발표. 저서로는『한국 공예사』와 에세이집『한국의 미-한국의 마음』등이 있으며, 유고집으로는『최순우 전집』(전 5권),『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나는 내 것이 아름답다』가 있음. 진홍섭((秦弘燮, 1918-2010) 전 국립중앙박물관 개성분관장, 황수영((黃壽永), 1918-2011) 전 국립중앙박물관장과 함께 개성 3걸(傑)로 지칭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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