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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과연 내가 이 박물관을 만들었습니까? 참소리축음기박물관장, 손성목

윤태석

축음기를 수리하는 손 관장



손성목 관장


손성목은 194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손용운과 김금녀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화점과 양복점 등으로 제법 성공한 사업가 대열에 있던 아버지 덕분에 성목의 유년기는 유복했다. 그러나 다섯 살 때 동생을 출산한 후유증으로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손길이 한참 필요했던 어린 성목의 심신은 연약해져 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네모 반듯한 나무상자 하나를 들어오셨다. “옜다. 성목아! 이리 와보렴.” 아버지는 그 상자의 뚜껑을 열더니 맨 위에 동그란 검정 판 하나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오른편에 뚝 튀어나온 검정 손잡이를 잡고 연신 돌리기 시작했다. 뻑뻑할 정도까지 돌린 후 이내 손을 놓자 ‘따~다단! 따라다~단!’ 라디오에서 듣던 노랫소리였다. “성목아 어때, 신기하지? 방금 감아놓은 태엽이 풀리면서 이 바늘이 검정 판을 긁어서 내는 소리란다. 이 축음기를 네게 줄 테니 틈틈이 들어 보거라. 고장나지 않게 조심하고~!” 당시만 해도 매우 귀했던 축음기는 다름 아닌 아들 걱정에 여념이 없던 아버지의 부정(父情)이었다. 그때부터 축음기는 성목의 유일한 친구이자 본래의 성격을 되찾게 해 준 명약이 되었다. 이 축음기가 바로 손성목이 오늘날 세계적인 수집가가 되게 한 단초였던 것이다.

1950년 말부터 새해 벽두, 6·25전쟁은 연합군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동절기까지 겹쳐, 군수 물품 확보가 곧 승리라는 공식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공산당의 착취 또한 심해지고 있었다. 이를 피하고자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성목의 가족은 1.4 후퇴를 틈타 월남 대열에 합류했다. 짐을 최소화해가며 가재도구를 정리하던 아버지는 축음기를 놓고 올 요량이었다. 그 눈치를 챈 성목은 축음기를 끌어안은 채 완강히 버텼다. 그리하여 험난한 겨울 피난길에도 38선을 넘는 여덟 살 성목의 등에는 축음기가 얹어져 있었다. 성목의 가족은 함경도 피난민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속초에 정착했다. 당시 1군단 산하에 있던 속초와 고성, 양양 일원은 군수 물품을 비롯한 민간인들의 화물수송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업 감각이 뛰어난 아버지는 이를 빨리 간파하고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역시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성목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사업을 정리해 묵호(지금의 동해)로 이주했다. 이후 성목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상과(商科)를 선택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당시 한·일 협정을 반대하는 시위는 대학에까지 번지고 있었다. 정의감이 강했던 성목은 시위에 적극 가담하였고 결국 사정당국으로부터 주동자로 지목되어 제적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를 피하기 위해 자원입대하였으나 전역 후 학생운동의 전력 등으로 급기야는 학업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한동안 시름에 빠져있던 중, 아버지의 부름을 받은 성목은 궁리 끝에 동해에서 전파사를 개업했다. 이미 5세 때부터 축음기를 가지고 놀았고 13세 때 삼촌의 고장 난 축음기를 고칠 정도로 이 방면에는 관심과 자질이 있었음을 잘 알고 있었던 아버지의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이때부터 틈틈이 전국 각지를 오가며 많은 축음기를 수집하는 등 어릴 때부터 최대의 관심사였고 꿈이었던 수집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이 무렵 묵호중 교사로 있던 우종숙을 만나 결혼(1977.6)했다. 결혼 후 아내의 권유로 전파사를 정리하고, (주)현대양행(한라그룹 전신)에 중견사원으로 입사(1975)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 근무를 자원하여 5년간 자재과장으로 있으면서 휴가 등을 이용해 유럽 전 지역을 돌며 해외 축음기수집에 본격적으로 나섰으며, 귀국할 무렵 수집 량은 600여 점에 달했다.

귀국 후 자기 사업을 계획하던 성목에게 강릉지역의 심각한 주택난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를 닮아 사업 감각이 남달랐던 성목은 곧바로 건설 회사를 설립해 아파트 임대사업에 뛰어들었다. 성목의 판단은 적중했다. 임대업의 성공과 부친이 남긴 유산은 건축업을 하면서 갖게 된 박물관건립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북·남미, 유럽, 아프리카 등 60여 개국을 돌며 본격적인 축음기 수집활동을 할 수 있는 재원이 되어주었다. 이를 기반으로 성목은 강릉시 송정동 216-15번지에 강원도 최초의 박물관인 ‘참소리방’을 개관(1982.4.15)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1992년(11.28) 약 300평의 부지에 400평 건물(3층)을 신축해 각각 ‘참소리축음기박물관’과 ‘에디슨과학박물관’을 열었다. 이후 박물관의 명성이 크게 높아지고 소장품도 늘어나자 강릉시에서 적극 나서서 지금의 저동으로 확장 이전(2007.4.10)케 되었다. 그리고 2014년(8.30)에는 ‘손성목영화박물관’도 문을 열어 이 일대가 작은 박물관 벨트가 된 것이다.  


미국 에디슨박물관장과 함께


필자는 2005년 가을 박물관 신축 공사가 한창이던 지금의 박물관에서 손성목 관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 부도가 났을 때도 축음기만은 뺐기지 않으려고 트럭에 싣고 다녔어요. 이미 국제적인 컬렉터로 이름이 나 있었던 지라 그 와중에도 에디슨이나 축음기와 관련한 유물이 나오면 세계 유명 옥션에서 연락이 오곤 했어요. 그때 런던 소더비로 날아가 구입한 것이 에디슨이 최초로 만든 이 마이크입니다(마이크를 들어 보이며). 돈이 없어 외상으로 가져온 후 나중에 갚느라 혼났습니다.” 새벽까지 이어진 그의 술회에는 긴 막장 같았던 세월의 회환이 생생하게 묻어나있었다. 손성목의 과업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강릉일대를 워싱턴DC의 스미소니언뮤지엄 그룹 같은 벨트로 조성하는 것이 남은 생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 길은 머나먼 고난과 역경이기에 지금도 고통의 시간이 자신을 짓누를 때면 박물관을 바라보며 “아! 과연 저 박물관을 내가 설립했는가?”하고 마음의 위로를 얻곤 한단다. “코리아의 손 컬렉션 때문에 우리 박물관은 볼품이 없습니다.” 몇 년 전 필자가 뉴욕의 에디슨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관계자에게 들은 얘기다. 손 관장의 위상을 알 수 있어 으쓱했지만,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손성목의 컬렉션은 양과 질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임에 분명하다. 그걸 우리는 한 개인의 온전한 희생으로 얻었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 한다. 우선 ‘문화재보호법’을 확대 적용해 의미 있는 자료는 국가 문화재로 지정, 그 가치를 인정하고 관리해줘야 한다. 또한 법인화의 문턱을 낮춰 항구적인 운영이 가능하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한편 박물관의 잉여 소장품에 대해서는 신규 공공박물관 건립 시 흡수해 제2,제3의 에디슨과 축음기박물관 건립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공립의 소장품 수집의 어려움까지도 해결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다. 해당 박물관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운영 컨설팅과 지원을 확대하여 안정화를 꾀해야 한다. 손성목, 그는 태엽을 감으면 살아나는 축음기 같은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우리는 손성목의 채무자다. 이제 더는 그의 과업이 사적 영역이 아님을 시급히 인식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그의 꿈이 더욱 화려하게 꽃피워질 수 있도록 함께 노력했으면 한다.


- 손성목(1943- ) 함경남도 원산 출생. 50여 년의 수집활동을 통해 세계 30여 개국의 축음기 15,000여 점, 에디슨발명품 2,000여 점, 음반 70,000여 점, 서적류 3,000여 점, 관련 자료 50,000여 점 등 축음기와 에디슨 관련 약 10만 여 점의 자료를 소장한 세계적인 수집가로 알려져 있음. 경희대 상과대 중퇴, 강원도 최초의 박물관 ‘참소리방’ 건립(1982.4.15, 강릉시 송정동, 참소리축음기박물관 전신). 같은 장소에 ‘참소리축음기박물관’ 및 ‘에디슨과학박물관’ 신축건립(1992.11.28), 참소리축음기 및 에디슨과학박물관 확장 이전(2007.4.10, 강릉시 저동), ‘손성목영화박물관’ 건립(2014.8.30), 문화체육부장관 표창(1993), 내무부장관 표창(1994), 에밀레상 수상(1995, 한국음향협회), 자랑스런박물관인상 수상(2006, 한국박물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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