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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외도外島에서 외도外道하다 외도 보타니아 Oedo - Botania, 이창호, 최호숙

윤태석

69년 겨울 외도 모습


거제도 앞 외도를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외도가 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더더욱 많지 않을 것이다. 외도는 식물도 박물관자료(소장품)임을 보여주며 ‘외도조경식물원’(외도 보타니아 Oedo - Botania)이라는 이름으로 관련 법령에 의해 당당히 등록(2001.6.11)된 박물관이다. 외도는 동백꽃같이 살다간 이창호(李昌浩, 1934-2003)선생과 그 잎에 물든 채 살아가고 있는 최호숙(崔浩淑, 1936- )선생 부부에 의해 조성되었다. 이창호는 1934년 평안남도 순천에서 10남매 중 4남으로 태어나 1.4후퇴 때 곧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알고 어머니며 다른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둔 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두 형제와 맨손으로 월남했다. 전쟁의 포화가 자욱하던 암울함 속에서도 대학공부를 마치고 여고 교사가 되었다. 반면 경기도 양주에서 4녀 중 3녀로 태어난 최호숙은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이창호를 만나 결혼(1961)했다. 신혼 초부부교사의 삶은 안정되고 행복했다. 그러나 이창호 특유의 도전정신과 사업가 기질은 교직사회를 벗어나 동대문시장의 의류 원단사업가로 변신하게 했다. 이미 이 계통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던 처가의 도움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숱한 고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거듭되는 좌절은 이창호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했지만 그를 결코 꺾지는 못했다.

이들 부부의 외도와의 인연은 1969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친구들과 남해로 낚시를 갔던 이창호 일행은 폭풍우를 만나 외도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당시 외도는 동백과 후박나무 등 원시 초목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고 단 여섯 가구만이 전기는 물론 선착장도 없이 불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룻밤 신세를 지기 위해 찾은 한 민가의 주인은 낯선 손님을 위해 빈방에 군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몸을 녹이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일행은 그만깜짝 놀라고 말았다. 쉼 없이 아궁이로 빨려 들어가는 땔감은 다름 아닌 수십 년 수령은 족히 돼 보이는 동백나무였던 것이다. “ 동백나무를 땔감으로 쓰면 어떡하느냐?” 따지듯 묻자. “동백나무 밖에 없는 걸 어쩌란 말이냐? 당신이 와서 한번 살아봐라.” 빵빵한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집주인의 한탄은 거세게 이어졌다. “ 우리도 이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뭍에 나가 살고 싶소, 땅은 팔리지도 않고, 제기랄......”, ‘이대로 뒀다간 민둥산이 되겠다.’는 생각이 순간 이창호의 뇌리에 강하게 스쳐 갔다. 외도에서의 생경한 경험과 충격을 뒤로한 채 서울로 올라온 이창호는 아내 최호숙에게 느닷없이 섬을 사자고 제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최호숙에게 섬은 1년 전(1968) 그리스의 갑부 오나시스가 고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을 아내로 맞을 때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데다 결혼 후 통 크게 선물로 준 ‘스코르피오스(Skorpios, 스콜피오섬으로 더 알려짐)’였다. 최호숙에게 외도는 스코르피오스였고 이를 구입하자는 남편의 가슴은 오나시스보다 넓고 멋져 보였다. 그때 최호숙 34세, 이창호는 36세였다.

70년대 초 외도 구조라분교 앞에서 강수일 이사와 함께

동상이몽의 3개월이 흐른 8월, 부부는 외도와의 공식적인 첫 대면을 통해 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족들과 친지, 친구들과 함께 외도로 향했다. 통영에 도착해 다시 배를 타고 거제도로 간 다음 버스를 타고 비포장 길을 달려 밤 10시가 넘어서야 구조라항에 도착했다. 짧은 휴식도 없이 대기하고 있던 고깃배로 갈아탄 일행의 두려운 항해는 계속되고 칠흑 같은 어둠과 파도가 삼킬 듯 거칠게 덤벼들 무렵 거기에 외도가 있었다.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이 눈을 뜬 건 다음날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스코르피오스는 없고 가파른 낭떠러지와 이름 모를 넝쿨과잔목들만이 밀림처럼 무질서하게 펼쳐져 있었다. 순박하게 내리쬐는 해금강의 태양과 쪽빛 파도는, 마치 거칠게 때로는 포근하게 이따금은 무념무상의 포악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긴장감을 자극해주었다. 마치『정글북』의 늑대소년 모글리 같은… 이처럼 외도의 민낯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이들 부부의 외도(外道)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원주민들이 내놓은(아니 맡겨졌다는 표현이 옳을듯) 땅을 조금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먼 미래를 위해 동백나무 5천 그루를 심기도 했다(1970). 한 집 두 집 주민들은 외도를 떠났고 마침내 1973년(10.26) 소유권이 완전히 넘어왔다. 교사로 모은 전 재산으로 직물 상을 했고 또 거기서 일군 밑천이 곧 외도이기에 이창호, 최호숙에게 외도에서의 자립은 무엇보다 절실했다.

고심 끝에 단행한 감귤농사와 양돈은 냉해와 돼지고기 파동으로 처참한 실패를 맛보게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남해안에도관광의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막막했지만 관광농원 사업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막연하게 들어 일단 거제군에 공원점사용 신청을 냈다. 그리고 또 몇 년의 기다림, 천신만고 끝에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1976.12). 본격적인 관광농원 조성이 시작된 것이다. 외도 역사상 가장
힘든 공사로 기록될 선착장 공사, 조각상과 화분을 옮기다 겪은 네 번의 골절, 나무를 심고 돌을 옮기다 지쳐쓰러진 쉴 새 없는 나날들. 하루에도 수십 번 포기하고 싶었다. 천만 근 무거운 몸으로 잠이 들 때면 차라리 해가 뜨지 않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이창호의 무모함과 최호숙의 세심함, 외도의 마지막 원주민으로 오늘이 있게 해준 강수일 고문의 전문성과 책임감은 서로에게 게으름을 용납할 수 없게 한 견제였고 격려였다. 그리고1992년에는 드디어 '문화시설지구'로의 지정허가를 받아냈다. 어떠한 희망도 약속받지 못한 채 섬을 샀고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지 20여 년, 서류를 만들어 수도 없이 관청을 들락 거린지 10년의 성과였다. 그러고도 3년, 1995년 4월 15일 역사적인 개원식을 가졌고 열흘 뒤인 25일 첫 손님을 받았다.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매일 33척의 유람선이 1만 8천 명까지의 손님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이창호는 이를 두고 인천상륙작전 때 연합군 대열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리고 8년 후인 2003년 이창호는 외도의 동백꽃이 아직 채 지기도 전인 3월 1일, 사진 한 장 없이 피난 나와 평생을 그리워하던 어머니! 그 절절함 마저 에덴 가든에 놓고 비너스 가든을 지나 짙푸른 해금강을 향한 채 숨을 거두었다.

1995년 개원 후 이창호와 최호숙


지난해(2014.3.1) 식물원장 자리를 아들에게 넘겨주고 집필활동 중인 최호숙 회장은 필자와의 인터뷰(2015.1.17, 분당 자택)에서 “외도정신은 가난과 도전의 힘이 일궈낸 작은 기적이다.”고 한마디로 요약했다. 또한 “오늘날 박물관이 많이 생겨나는 것은 환영할 만하다. 다만, 보다 진중한 정신과 길게 보고 묵묵히 매진하는 인내가 중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지금도 외도를 찾는 내방객이 겪을지도 모를 해상사고에 대한 걱정과 외도와 직원들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서비스 불안으로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최 회장의 노이로제(신경증)는 어찌 보면 공공재로서 박물관이 가져야 할 무거운 책무를 반영하는 듯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무모함과 번뜩임’이 외도(조경식물원)를 오늘날 우리 앞에 있게 한 이창호와 최호숙 회장의 힘이며 이것이 곧 외도인 것이다.


- 이창호(李昌浩, 1934-2003) 평안남도 순천 출생, 1·4후퇴 때 월남, 고려대 수학과 졸업, 최호숙과 결혼(1961, 현 외도 보타니아 회장), 수원 성신여고 교사 역임(8년간). 동대문시장에서 의류원단사업(흥일상회)으로 성공, 외도 매입(1969-73), 거제시민상 수상(2000), 신지식인 모범사례 최우수상 수상(2000), 제2회 한국관광대상 우수상 수상(2000), 외도 개발 및 외도 초대회장

- 최호숙(崔浩淑, 1936- ) 경기도 양주시 덕정 출생, 서울사범과·성균관대 국문과·이대 대학원 졸업, 초등학교 교사 역임(18년간), MBC성공시대<외도해상농원 이창호, 최호숙 부부 편> 출연(1999), 제8회 바다의 날 유공자 대통령 표창 수상(2003), 남편 이창호와 외도 개발, 외도 보타니아 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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