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7)<국제시장>에서 핀 소통의 꽃 한국미술관, 김윤순

윤태석


한국미술관(용인)

영화 <국제시장>은 우리 현대사의 편린을 펼쳐놓으며 동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흰머리카락한 올 한 올에 녹아있는 유전자 같은 기억을 자극하고 있다. 대표적인 1세대 미술관장인 한국미술관의 김윤순 관장의 삶도 또 하나의 <국제시장>같다는 생각이 든다.

김 관장은 1931년 함경남도 흥남에서 광산김씨 집안의 2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도였으나 조부가 함경남도지사로 부임함에 따라 함경도에 정착하게 되었다. 조부의 영향을 받은 아버지는 나진 시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자그마한 사업으로 축적된 자금으로 학교를 건립해 나진시교육발전에도 기여하는 등 윤순의 집은 지역에서 꽤 덕망과 영향력 있는 명문가 대열에 놓여 있었다. 오빠를 일본에 유학을 보냈고 더군다나 장남인데도 피아노를 전공하게 할 만큼 윤순의 조부모님과 부모님은 개방된 사고를 갖고 있었다. 한편 윤순이 14세가 되던 1945년 정월 조부모를 놔둔 채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이는 윤순에게도 집안에도 큰 아픔이었지만 곧 이어 찾아온 광복은 이러한 분위기까지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느린 듯 큰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도 방학이면 어김없이 귀국하는 큰오빠에게서 서구문화가 빠르게 흡입되던 당시의 일본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고 피아노와 일본어도 배울 수 있었다. 광복 2년 후인 1947년에는 우여곡절 끝에 전설적인 무용수 최승희(崔承喜, 1911-67)선생의 연구생으로 발탁되어 잠시 무용을 배우기도 했다. 이렇듯 윤순은 예술적 환경 속에서 감수성 예민한 소녀기를 보내고 있었다. 광복은 한반도에 또 다른 변화를 예고했다. 미국과 소련이 중심이 된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분단의 전조 증상으로 나타났으며 윤순의 가족도 이를 직감하게 되었다. 윤순의 가족들은 큰 삼촌과 할머니가 내려와 있던 서울로 윤순을 먼저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윤순은 작은삼촌을 따라 삼엄한 경계를 뚫고 한탄강을 건너 서울로 오게 되었다. 윤순의 서울행은 신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들이 자식을 서울로 보내는 당시 풍조에 편승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명동이 내려다보이는 남산동 집에 터를 잡은 윤순의 서울 생활은 복잡한 친척들과의 관계, 먼 학교 등으로 인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서서히 서울생활에 염증을 느낀 윤순은 가족들에게 동의를 구해 남북을 오가던 일행들의 틈에 끼어 혹한에도 불구하고 한탄강을 건너 흥남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때 윤순의 나이 16세였다.

윤순이 최승희를 만났던 것은 이 이후였다. 그리고 발발한 한국전쟁은 윤순에게 영화<국제시장>의 주인공이 되게 해주었다. 윤순은 <국제시장>에서 어린 주인공이 흥남부두에서 탔던 빅토리아호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 배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거제도를 목적지로 해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를 떠났고 윤순은 오빠, 언니, 동생과 친지를 뒤로 한 채 그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이브에 LST라는 커다란 배를 타고 부산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후 부산에서 북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남동생 영준을 천신만고 끝에 만나게 된 것은 기적보다 더 값진 감격이었다. 무질서와 빈곤, 전염병과의 싸움은 부산에서의 피난생활을 접고 훨씬 안정적이던 거제도행을 결심하게 했다. 거제도에서 윤순은 최승희에게 배운 무용 덕에 피난민 분교에서 무용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휴전과 함께 서울은 재건으로 활기를 얻기 시작했고 윤순의 가족도 거제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다.

서울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된 1955년, 윤순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 편입할 수 있었다. 월남한 학생들을 구제하는 프로그램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56년 피난민의 곤궁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사주를 잘 타고난 덕분에 분에 넘치는 남편’(김윤순 관장의 표현) 장원길을 만나 결혼했다. 26세던 윤순보다 다섯 살이많던 장원길은 서울공대 화학공학과를 마치고 대학원 논문을 준비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장원길은 윤순의 타고난 친화력과 통 큰 여장부 근성을 늘 높이 평가해준 든든한 버팀목으로 평생을 함께 해주었다. 57년 첫아이가 그리고 연이어 태어난 딸이 성장하여 학교에 들어가고 경제적인 안정과 마음의 여유가 생길 즈음 윤순은 자연스럽게 인사동 화랑가를 기웃거리게 되었다.




그것은 주거지 남산동과 가까운 탓도 있겠지만, 그가 전공한 문학과의 연계성 그리고 보다 근본적 으로는 예술을 접하며 자랐던 유년기로의 회귀 본능에 따른 것이었다. 서세옥, 이종상, 장운상, 장우성, 박노수 등 적지 않은 작가들이 차츰 익숙해졌고 소품을 구입하는 빈도도 높아져 갔다. 신작이 입수되는 날이면 어김없이 주변 사람들을 초대해 작품을 감상하며 몰랐던 정보를 공유하였으며, 이는 이론서와 현장을 더 자주 접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차츰 화가들과 화랑가로 알려졌으며, 국립현대미술관에도 관심을 갖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때마침 미술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1978년 11월 국립현대미술관은 현대미술관회를 발족했다. 여러 관계자의 추천으로 이미 ‘남산동 사모님’으로 통하던 김윤순이 상임이사를 맡게 되었다. 상임이사가 된 윤순은 특유의 친화력과 추진력으로 현대미술관회 회원을 크게 늘려 나아갔다. 이에 맞춰 미술관아카데미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되어갔다. 그러던 83년 어떤 독지가의 내놓은 건물이 계기가 되고, 현대미술관회 회원 120명이 운영기금을 희사하면서 한국미술관이 가회동에서 문을 열게 되었다. 처음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 격이어서 운영 책임 역시 김윤순이 맡게 되었다가 여러 사정상 민간기구화되어, 89년 서초동으로 94년부터는 지금의 용인으로 이전하여 오늘날 한국미술관으로 남게된 것이다.

한국미술관 개관식(1983)


한국미술관의 자랑은 개관 때부터 30여 년간을 운영하고 있는 ‘문화예술아카데미’이다. 미술관에서 소통을 위한 장치로 이만한 것이 없음을 김윤순은 현대미술관회를 통해 확인했던 것이다. 미술관의 공익적인 인식을 매우 빨리한 셈이다. 윤순은 소통을 매우 강조한다. 따라서 한국미술관 아카데미에 ‘대화력 교실(Culture Speech)’이 있는 점은 크게 어색하지 않다. 김 관장은 ‘ 말’은 인간관계를 결정짓는 ‘인생의 열쇠’라고 말한다. 김 관장의 말은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며, 소통은 미술관의 객관적이고 열린 활동을 뜻한다. 그리고 미술관이 갖는 객관적이며 공익적인 태도는 미술관을 가치재(Merit Goods)로 인정케 하며 권위와 항구성을 담보해주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시장>의 여정에서 얻은 소통의 지혜는 미술관의 공적기능이 항구성으로 승화되는 모범이어서 주목된다.


- 김윤순 (金允順, 1931- ) 함경남도 흥남 출생, 1.4후퇴 때 월남해 거제도에서 교편생활,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1954), 국립현대미술관 (사)현대미술관회의 상임이사(1978-83), 한국미술관 설립(1982.12), 한국미술아카데미 개설 30년간 운영, 국립현대미술관운영자문위원·경기도미술관건립추진위원(2000-01), 현재_( 재)석주미술상 이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 (사)한국박물관협회 고문『세계미술관기행』(코리언북스, 1998),『작은 미술관 이야기』(집문당, 2002),『성공하는 대화의 기법』(집문당, 2003),『秘花 그대 아직 꿈속인가』(글마당, 2010), 문화체육부장관상(1994), 자랑스러운박물관인상(2003), 월간미술 대상(2004), 경기도박물관인상 대상(2006), 경기도지사 상(2010) 등 수상.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