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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장 선하게 쓴 재물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한영제

윤태석


길선주(吉善宙, 1869-1935)목사 작품과 향산


   향산(香山) 한영제(韓永濟)는 1925년 6월 4일 평안북도 구성군 사기면 향산동에서 한경호(韓京浩)와 김치호(金致浩) 집사 부부의 3남으로 태어났다. 한영제가 회갑이 넘어서 쓰기 시작한 아호 향산은 고향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향기로운 산’을 의미하기도 있지만,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의 침전된 그리움의 집약이며, 성서(아가8:14)에서도 좋은 의미가 있는 신앙의 상징체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가 태어난 향산동은 ‘새당거리’라 불리었는데, 한문으로 신시동(新市洞)이라고 썼다. 여진족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 조선 시대에 쌓은 동고성(東古城) 안 마을에서 향산은 태어나 자랐다. 따라서 성안에서 산 아래를 보며 꿈을키웠던 것이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개관전 및 감사예배


  한편, 산골임에도 기독교가 일찍 들어와 새당거리에 신시교회( 新市敎會)가 설립(1895)된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신시교회는 평북에서 처음 세워진 의주읍교회(義州邑敎會, 1886) 다음으로 문을 연 역사를 가지고 있어 향산은 자신이 이 교회 출신인 것에 대해 자부심이 컸다. 향산은 갓난아이 때 경기(驚氣)를 일으켜 소위 죽었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덤으로 주어진 인생, 욕심 부리지 말고 살자.” 향산은 이를 자주 얘기했다고 한다. 그를 겸손하게 살도록 했던 하나의 단서로 보인다. 향산은 1936년 사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뒤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1944년 1월 신시교회에서 고화일(高化一)과 결혼해 2남 2녀를 두었다. 현재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한동인 관장이 그의 장남이다. 향산의 가족은 큰 할아버지 한득룡(韓得龍, 1861-1933,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 목사의 영향으로 조부모로부터 3대째 신시교회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이 교회 유치원 제1회 졸업생이기도 한 향산은 주일학교 시절 유치원 설립과 목회자를 위해 전재산을 기부한 함실녀(咸實女), 이득하(李得河) 두 교인을 통해 재물을 선하게 쓰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한편, 향산은 해방 직후 선천의 평북노회(平北老會) 고등성경학교에 입학(1947년 3월 수료)했지만 북한의 공산화로 월남(1947.4)했다. 이때 부모님과의 이별은 평생에 큰 한으로 남아 이후 어르신들을 위해 복지사업을 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향산(중앙)


  6.25한국전쟁기에 향산은 기독교에 대한 사역을 본격적으로시작하였다. 먼저 대구 피난생활대구평북교회 설립(1952)에 참여하였으며, 1955년 5월에는 역시 대구에서 교계 선배들의 권유로 평북교회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전문서점 정문사(正文社)를 창립했다. ‘바른 말씀을 전한다’는의미의 정문사는 이후 서울 충무로로 이전개업(1958.8)했으며,1960년 3월에는『세계인명대사전』을 출간하기도 했으나 같은 해 5월 사회 불안정으로 경제적위기를 맞아 정리되었다. 한편, 1956년 12월에는 기독교교문사(基 督敎敎文社)를 창립해 출판 등록했으나 이 역시 정문사와 함께 정리(1960.5)되었다가 그해 11월 향산에 의해 종로5가에서서점 교문사로 다시 문을 열었다. 






향산 한영제


  그러다가 1970년에 기독교문사(基督敎文社)로 출판사 등록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문서 선교의 와중에 향산은 안수집사(1959.10, 평북교회)와 장로로 장립(將立, 1964.5, 서울 신흥교회)되기도 했다.1985년은 교문사에도 또 우리 기독교사에도 역사적인 해로 기록될 것이다. 향산이 앞장선 10여 년의 작업 끝에『기독교대백과사전』(총16권)이 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전은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1985)하는 등 지금까지도 기독교계의 기념비적 출판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외에도『기독교대연감』,『한국기독교역사사전』등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도서를 발간하여 한국 기독 출판에 크게 기여해오고 있다.한편 향산은 출판사업과 더불어 그동안 사회와 교회로부터 받은 사랑을 갚기 위해 고민하다 1985년에는 사회복지법인 이천한나원을 2005년에는 한나그린힐을 설립했다. “북에 두고 온 부모님을 모시듯 정성을 다하겠다.”던 향산의 다짐처럼 그가 떠난 지금도 180여 명의 어르신이 아늑한 삶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노력이 크게 평가되어 향산은 평신도로서 유일무이하게 대한예수교장로회의(통합) 총회장과 한국장로교회협의회 회장에 피선되어 교계 화합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1992-93). 




향산(좌측)과 리진호 지적박물관장



  한편, 향산은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독교를 처음 전파한 선교사들이 사용한 성경이나 그들이 생성한 많은 문서들, 교육에 관한 자료들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초기 우리나라 목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료들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그가 이러한 쪽에 관심을 갖게 한 이는 숭실대학교에유물을 기증해 오늘날 ‘숭실대학교한국기독교박물관’을 있게 한 김양선(金良善, 1908-70) 목사였다. 김 목사는 일찍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북에서 부터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향산은 20대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기독교자료의 중요성과 자료의 수집·보존이 얼마나 중요한 일 인지를 김 목사와의 근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광복기와한국전쟁기에 남북을 세 차례나 오가면서 사료를 반입하다가 해주 앞바다에서 부인과 차녀를 피격으로 잃게 된 김 목사의 안타까운 가족사와 6·25 때 소장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일본(국제기독교대학)과 미국에 이송하기까지 하며 자료 유실을 막았던 김 목사의 집념과 희생은 향산에게 큰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향산이 평생을 청계천, 전국의 고서점 등을 마다치 않고 수많은 기독교 관련 문서를 모으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평생 수집한 10만 여 점의 방대한 교회사 관련 자료는 한국 교계에 헌납한다는 신념으로 2001년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을 설립했다. 백과사전 발간 시 조사하고 수집, 분석한 엄청난 양의 자료 역시 이때 박물관에 소장되었다. 기독교를 전문으로 한 종합박물관인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향산의 숭고한 기독교적 삶과 헌신으로 귀결한 것으로 향산 그 자체인 것이다.“아버지는 사심이 없으셨으며, 주어진 일을 사명으로 생각하고묵묵히 성실히 행하는 삶을 자식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재물에도 욕심이 없으셔서 모든 걸 다 돌려주시고자 하였습 니다.” 아들 한 관장의 회고다. 향산은 크게 교계, 기독교출판계, 사회복지사업, 박물관 이렇게 네 분야에 헌신했다. 범인에게는 무엇하나도 쉽게 행하기 어려운 과업인 것이다. 공명(公明)과 자기 희생 - 향산, 그 자체가 곧 가장 선하게 쓴 재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향산 한영제 (1925-2008) 평안북도 구성군 사기면 향산동에서 한경호·김치호 집사 부부의 3남으로 출생. 원주대학(상지대 전신) 경제학과 졸업. 미국 Linda Vista Baptist Bible Coiiege and Seminary 명예인문학 박사, 1944년 결혼. 1947년 월남. 대구 평북교회 창립에 참여(1952). 1955년 이성호(李聖號) 목사, 정학선(鄭學善) 집사, 정영록(鄭永錄) 집사 등과 정문사 발족, ‘기독교교문사’설립(1956). 신흥교회 장로 장립(1964),『기독교대백과사전』(전16권) 완간(1985).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1985), 이천한나원 설립(1985), 한국기독교출판협의회 회장(1990),

한국기독공보사 사장(1990),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 총회장(1992), 해외동포 선교회 회장(1993),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설립 및 초대 관장(2001), 한나그린힐 설립(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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