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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전통문화로 공공적 가치의 실천 온양민속박물관, 김원대

윤태석

구정 김원대 선생


구정(龜亭) 김원대(金原大)는 1921년 9월 23일 경북 안동에서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후손 김선국(金善國) 선생과 이복임(李復任) 여사의 2남 6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집안의 장손인 부친은 엄격한 성품의 전형적인 선비였고, 모친은 온화하고 자상한 사대부집 맏며느리였다. 큰집인 관계로 드나드는 사람이 늘 많았지만, 원대의 부모는 손님대접을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일곱 살 때 원대는 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조부는 기억력이 좋고 총명한 손자를 무척 귀여워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조부가 병석에 눕게 되자 원대의 한문공부도 멈추게 되었다. 부모님은 전답까지 팔아가며 조부의 병환 치료에 정성을 다했다. 그럼에도 조부의 병세는 더욱 깊어져 원대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끝내 숨을 거두셨다. 조부의 긴 병환으로 살림은 어려웠지만 공부마저 멈출 순 없었다. 열 살이 된 원대는 그때서야 십 리나 떨어진 일직보통학교(一直普通學校)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하에서의 학교생활은 원활하지 않았다. 운동회 날 만국기 속에 태극기를 그려 운동장에 내걸었다가 발각되어 홍역을 치르기도 한 담임 이상헌 선생은 일본인 교사들의 눈을 피해 틈틈이 우리 역사와 한글을 가르쳐주곤 했다. 이때 배운 민족의식은 훗날 원대가 박물관을 건립하는데 적지 않은 동기가 되었다.


계몽사임직원들의 온양민속박물관 견학(1978.11)


원대의 집안 사정은 점점 어려워만 갔다. 월사금을 내지 못하자 교육청에서 추수해놓은 보리를 압류하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보통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원대에게 그 이상 상급학교 진학은 의미가 없었다. 좌절 속에서 1년을 쉬었지만 현실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원대의 첫 일자리는 안동에 있는 잡화점이었다. 타고난 책임감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상대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긴 했지만, 안동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이 재미있어지자 더 넓은 곳에서 꿈을 펼쳐봐야겠다는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봄 냇가 버들가지에 물오르듯 패기로 가득 찬 17세 청년 원대는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당시 만주는 한·중·일·러 각국의 문물이 활발하게 유통되는 경제의 격전지였다. 이곳에는 가난을 이겨보겠다고 원대의 친척 몇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그중에는 원대와 같은 종파(宗派)의 종손격이 덕흥상점(德興商店)이라는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원대는 그의 배려로 거기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덕흥상점은 주민들에게 미역, 멸치, 내의, 포목, 양품 등을 팔거나 주변 소도시 가게에 납품도 하는 도소매상이었다. 원대는 특유의 총명함과 고향에서 잠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성실성과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급기야는 경리, 판매, 배달 등 상점의 전 업무를 두루 맡아 볼 수 있었다. 김원대는 만주로 건너 간지 5년 만이던 22세 때 잠시 고향에 내려와 박미혜(朴美惠) 여사와 결혼(1943)했다. 다시 만주로 온 김원대는 다른 직원들에 비해 대우도 달리 받아가며 2년 동안 열심히 일했다.


계몽사 서점(1946년 대구)



1945년 초 막바지로 치닫던 태평양전쟁은 만주의 정세를 한 치 앞도 못 보게 했다. 마침내 광복을 반년 앞두고 원대는 만주생활을 접기로 결심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원대에게 만주에서 체득한 경험은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게 했다. 광복은 민족자존의 회복과 우리글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를 간파한 청년사업가 김원대는 발 빠르게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작했다. 대구에서 신문과 함께 시작한 사업은 꽤 잘되어 얼마가지 않아 판매수익금 6만 원이 축적되었다. 이 돈으로 1946년 대구 포정동 6번지에 서점 계몽사(啓蒙社)를 창업했다. 1947년에는 미군정청에 출판사로 등록해 시집과 한글 사전, 옥편 등을 냈고,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1일 막 수복된 서울 종로1가에다 사무실을 열고 우리 정부에 재등록해 본격적으로 도서발간업무를 시작했다. 그리고 1959년부터는 당시로써는 가히 파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동전문 문학 전집인 『세계소년소녀문학전집』을 과감하게 발간하였다. 그리고 66년에는 『세계소년 한국전기전집』을 1973년에는 『소년소녀 한국문학전집』을 야심차게 펴냈다. 이 전집류는 방문판매라는 새로운 판매기법을 도입해 획기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1969년 중학교 입학시험 폐지로 아동도서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호재까지 만나 계몽사는 일약 굴지의 아동도서전문출판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회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럴수록 김원대에게는 자신과 어린이, 고향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 민족에 대한 채무의식이 커져만 갔다. 배우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공, 6대 장손으로서 고향에 대한 책무 그리고 고생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 그리고 일찍 사별한 아내 등이 그것이었다. “아버님의 신념은 모든 것이 교육과 관련되어 있었는데요. 박물관을 설립하기 전에 고향인 안동에 고등학교를 세우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버님께서는 60년대 후반, 70년대 초 당시 지방의 낙후된 여성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팔아서 돈을 벌었으니 그것을 다시 아이들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씀도 입버릇처럼 하셨구요. 학교와 박물관을 통해 이를 실천하신 겁니다.”
김원대는 1974년 안동에 길원(吉原)여자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그리고 1978년에는 온양민속박물관을 세웠다. 박물관이 김원대 선생의 고향이 아닌 온양에 자리 잡게 된 이유는 온양이 남한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고 인접한 현충사는 당시 모든 학생이 들러야만 했던 수학여행코스였기에 학생을 비롯한 전 국민이 가장 편하게 들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사업가다운 마인드에 박물관의 공공적 기능과 역할이 매우 잘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박물관 로비, 김원대 선생의 흉상



성공한 사람들은 본인이 출연해 건립한 시설에 대해 본인의 호나 본인이 설립한 회사의 이름을 이름자에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원대 선생은 주변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지역인 ‘온양’을 붙였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박물관 로비에 당신의 흉상도 놓지 못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흉상을 조성한 이유는 설립자의 생각이 곧 박물관이고 그분의 정신과 철학이 박물관을 이해하게 하는 또 다른 유물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선친이 작고한 후에야 설치한 흉상 앞에서 김은경 현 관장( 제4대)은 술회했다.


온양민속박물관 전경(1980년대 초)



온양민속박물관은 명품보다는 그것이 비록 소소하더라도 사라져 가는 우리 민속과 전통문화를 보존하여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박물관을 열어 미래의 아이들에게 우리의 사라지는 옛 전통문화를 보여주고자 했던 김원대 선생의 공익적인 정신은 온양민속박물관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유물인 듯하다.


- 구정 김원대 (1921-2000) 경북 안동 출생, 일직보통학교(안동)졸업, 박미혜 여사와 결혼(1943) 슬하에 3남 2녀, 2000년에 타계. 계몽사 설립(1946), 길원여자고등학교 설립(안동)(1974), 온양민속박물관 설립(1978), 재단법인 계몽문화재단 설립(1987), 계몽학원 설립(안동) 및 이사장 취임(1972), 한국출판협동조합 이사장(1964), 계몽사 회장 취임(1977), 제1회 색동회상(1976), 서울특별시 문화상 출판부문 (1978), 국민훈장 석류장(1980), 대통령 표창(1984), 세종문화상(1989) 수상. 『한글맞춤법통일안』(1945)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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