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0)아버지의 이상향에서 아들이 일군 별들의 향연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 김오성

윤태석


1968년 군 영내에서 목조작업 중


김오성(金五聖)은 1945년 4월 전남 담양에서 5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리고 전북 부안군 보안면 외포에서 1966년까지 살았다. 6·25전쟁 상황에서는 유천(柳川)초등학교에 입학해 학교를 다니다가 중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김병렬(金秉烈, 1921-98)을 따라 잠시 군산으로 전학 갔다 다시 돌아와 외포에서 졸업했다. 아버지가 교사로 있었던 당시로서도 오성의 집은 대가족이었기에 곤궁한 형편이었다. 부친 김병렬은 이리(裡里)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고향에서 농촌계몽운동과 산악농업을 개척해 대통령상금탑산업훈장(1963)과 제5회 3·1문화상(1964)을 수상한 농촌계몽가 겸 농민교육자였다.

오성의 아버지는 한동안 서울에서 농민문학가 이무영(李無影, 1908-60)선생 등을 비롯한 언론계 관계자들과 농촌운동을 위한 폭넓은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공부도 썩 잘하고 머리도 좋은 오성을 서울의 중학교에 진학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건강에 갑자기 문제가 생기면서 가세도 급격히 기울어 오성은 학업마저 중단하고 집안일을 돌봐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오성은 변산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때 만난 김형수선생에게서 그림공부를 하게 된 것이 조각가도 되고 훗날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金丘苑野外彫刻美術館)도 건립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중반 김경승 선생 아틀리에에서 이상재 선생상 작업 중


1965년, 아버지는 새로운 형태의 농민학교 건립을 꿈꾸며 뜻을 같이하는 제자들과 함께 변산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도청리(현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를 농촌건설의 적정지로 정하고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초 약속됐던 관의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고 고생을 못 견딘 제자들도 하나둘 떠나면서 그의 이상도 접어야 했다. 

한편 오성은 성적이 우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로서만 정규 교육을 마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가난한 집안 형편과 동생들을 뒷바라지해야만 했던 현실에 따른 것이었다. 오성에게 미술의 재능이 있다고 여긴 아버지는 궁리 끝에 3·1문화상을 함께 수상해 인연이 깊던 조각가 김경승(金景承, 1915-92)선생에게 부탁해 오성을 마포구 상수동 김선생의 작업실로 보냈다. 이때가 1966년의 일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67년 말 오성은 미8군에 카투사 병으로 입대했다. 오성은 군 생활 중 틈틈이 작품활동을 병행하여 목조작품으로 첫 번째 개인전을 갖기도 했다.



한국은행 본점에 소장된 <분수령>


1970년 전역한 후에는 고향에 잠시 머물며 불상 조각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다시 김경승 선생 아틀리에에 복귀한 뒤 불교미술보다는 순수미술에 전념했다. 1972년 처음 출품한 국전에서의 입선은 오성에게 큰 자신감을 갖게 했고 연이은 1974년 국전에서는 특선을 차지하게 되었다. 1983년에는 국전 초대작가로 추천되어 국립현대미술관의 ‘84현대미술초대전’에 출품하게 됨으로써 독학한 조각가를 미술계에서 인정해준 듯 해 깊은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 초대전은 백문기(白文基, 1927-) 선생에게도 사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백문기 선생은 지금까지도 미술 외에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주신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1986년에는 백악미술관에서 갖은 개인전에는 한국은행의 박성상(1923-2010) 총재가 방문해 작품 <분수령>을 구입하고 또 한 점을 추가 주문하는 등 예상외의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또한 이 전시가 인연이 되어 평론가 신항섭선생을 통해 10인의 구상미술작가(동 서양화8인, 조각2인)를 대상으로 한 평론집 ‘구상미술에의 초대’에 선정되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 


한편, 한국은행에 소장된 작품이 일본에 소개되면서 일본 모(某)기업 회장의 주도하에 일본 지바현(千葉県, ちばけん)에 조각공원을 세우기로 하면서 작품제작을 위해 금구원으로 귀향(1991)하였으나 일본 측의 사정으로 인해 결국에는 중단되고 말았다.


아울러, 김오성과 사돈지간이던 ‘옹기민속박물관’의 정병락( 丁炳樂, 1940-94)설립관장에 의해 일본과 유사한 국내계획도 추진되었으나 애석하게도 정관장이 일본 출장 중에 불의의 사고로 고인이 되면서 이 계획 역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까지 오성은 20여 년 간을 김경승·백문기 선생 작업실과 경기도 벽제의 작업실에서 활동했다. 1998년, 상갤러리(서울 인사동)에서의 세 번째 개인전 이후로는 대작을 옮기기가 어려워 2010년부터 2012년까지 3년을 연달아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했다. 이 과정에서도 아이들은 잘 성장해주었고 미술관 운영도 아쉬운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90년대 말 금구원천문대



한편,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 서울에서 셋방살이 끝에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할 힘이 생겨 한시름 놓을 찰나에 별을 보는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천체망원경을 구입하면서 전세살이는 다시 이어졌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고향에 내려올 때에 천문대를 직접 지어 본격적인 별 보기도 시작되었다. 규모와 설비의 정도는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제1호 조각공원과 제1호 사립 천문대가 김오성으로부터 시작되게 된 것이다. 김오성은 지금도 이웃은 물론 멀리서 찾아오는 이에게 낮에는 작품에 대해 밤에는 별을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별을 좋아하는 인연으로 조각 작업과 관련하여 입체 석각으로 4개의 천구의(Celestial globe, 天球儀)를 제작했거나 지금도 제작 중에 있다. 이러한 활동이 유명 과학 잡지에 실리게 되면서 과학자 김용관(金容瓘, 1897-1967)의 이름을 딴 ‘제1회 김용관 과학상’을 받기도 했다. 





금구원야외조각미술관 전경


1966년 아버지가 금구원을 개척할 때 오성이 서울로 가면서 남긴 4점의 석조 두상과 흉상은 늘 아버지의 개척농장에 세워져 있었다. 이후로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한 점 한 점 농장을 채워 나갔다. 이렇게 해서 농민학교를 설립하고자 했던 아버지의 여망이 멈춘 자리에 조각공원이 설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 후반에는 서울에 있는 작품 대부분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산속 황무지는 문화와 예술의 터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86년 백악미술관 전시회를 보고 유명여성지에서 취재를 요청해왔다. 이에 따라 금구원과 경기도 벽제의 작업장이 외부에 알려졌다. 우리나라 조각공원의 효시는 금구원조각공원이라고 명시하여 활자화된 것이다. 


그 무렵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재직하고 있던 모 인사를 문화관광부에서 만났다. 그는 금구원조각공원을 「 박물관법」에 의해 등록하자고 적극 권유했다. 하지만 김오성은 극구 사양했다. 아버지의 꿈이 서린 금구원이 아버지의 이상까지 도달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후 30년. 이제 아버지가 그토록 꿈꿔왔던 농민계몽의 터전에 김오성의 작품이 새로운 문화계몽의 기운을 밤하늘의 별에 총총히담아내고 있다.



- 김오성 (1945-) 전남 담양 출생, 전북 부안 유천초등학교와 변산중학교 졸업, 독학으로 조각가가 됨, 목조개인전(1969)(미8군 영내)을 시작으로 총7회 개인전 개최, 금구원조각공원 설립(1966)(부친 김병렬이 개척한 금구원 농장이 조각공원의 효시), 금구원 천문대 설립(1991)(사설천문대 제1호), 미술관 등록_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2003), 입체석각천문도 천구의 제작(한국최초). 자랑스런 전북인 영광의 얼굴(예술상), 부안군민의 장(예술부문), 전라미술상, 김용관 과학상, 해양수산부장관상, 국전특선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