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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중남미의 뜨거운 고독 중남미문화원 병설박물관, 홍갑표·이복형

윤태석

이복형, 홍갑표


부부는 거의 30년을 넘게 중남미 지역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인생에서 가장 왕성한 시기를 오롯이 그곳에서 보낸 것이다. 우리나라만큼이나 어려웠던 60년대부터 중남미에서의 외교관 생활은 애국심에 의지한 채, 국가발전만을 염두에 둔 대한민국 외교사의 한 편린이었다. 그러는 동안 역경과 보람도 참 많았다. 금년 5월 18일, 이들 부부에게 오랜 이별 끝에 공항에서 만난 손주의 입맞춤 같은 또 하나의 선물이 찾아왔다. 국제박물관의 날(매년 5월 18일)을 기념해 우리나라 박물관인들이 주는 ‘자랑스런박물관인상’ 수상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자랑스런박물관인상 원로 부분 중남미문화원(박물관) 이복형 원장(관장)님!” 사회자의 호명이 울려 퍼지는 장내 저 너머로 라틴아메리카 축제만큼이나 정열적인 자태의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올해로 이복형과 57년을 해로하고 있는 재단법인 중남미문화원 이사장 홍갑표다. 중남미문화원을 설립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하고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문화원의 구석구석을 정성을 다해 가꾸어나가는데 원동력 하나가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멕시코 골동품시장에서


“이복형 대사 없는 중남미문화원은 생각할 수 없고, 홍갑표 없는 이복형은 존재할 수 없다.”고 문화원과 이들 부부를 잘 아는 어느 문화계 인사의 말이 기억난다. 반세기 넘게 함께해온 부부의 연(緣)과 외교관으로 또 중남미문화원 설립과 운영의 전 과정에서 두 사람의 협업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홍갑표(洪甲杓)는 1934년에 충남 부여에서 남양홍씨(南陽洪氏)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복형(李福衡)은 여주이씨(驪州李氏) 가문의 3남매 중 차남으로 1932년에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한국전쟁 때 대구 피난처에서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당시 군인이던 이복형은 1956년에 미군의 통역장교 임무를 띠고 미국으로 갔다가 2년 후인 1958년에 돌아와 결혼했다. 홍 이사장은 이 원장의 ‘정직함과 성실함 그리고 청년다운 순수한 열정’에, 이 원장은 홍 이사장의 ‘자기 색깔이 분명한 당찬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외모’에 매료되었다고 저서를 통해 홍갑표는 술회했다. 
마포에서 시작한 신혼생활은 시작부터가 고난이었다. 시할머니와 마흔 전후에 홀로된 시어머니에 6·25전쟁 통에 혼자된 아이 넷 딸린 시누이까지 거기에 역시 전쟁 통에 시아주버니마저 실종된 터라 갑표는 졸지에 종갓집 종손 외며느리가 되고 말았다. 몰락한 양반 가문의 팔남매 중 막내로 이부자리 한 채 해오지 못하고 시집온 처지까지 더해 시댁식구들에 의한 시집살이는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남편 이복형의 속 깊은 배려와 사랑은 큰 힘이 되어주었다. 한번은 스트레스로 인해 생긴 늑막염이 폐결핵으로까지 발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뱃속의 아이와 삶의 바른 가치를 몸소 실천해 주셨던 친정 부모님은 이 현실을 꼭 이겨내야 한다는 강한 의지를 갖게 했다. 이런 환경을 이겨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보란 듯이 남편을 성공시켜 집안을 일으키는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명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전쟁으로 인해 대학을 나오지 못한 남편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대학공부였다. 이를 위해 갑표는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군인신분이었던 이복형 역시 밤낮으로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 드디어 감격의 졸업장을 쥔지 얼마 되지 않은 1960년 9월 어느 날 신문에 난 작은 기사 하나가 갑표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호주 국비 장학생 선발 고사 공고였다. 우리나라와 호주정부의 협약으로 몇 명의 장학생을 뽑아 호주에서 일정한 교육과정을 거쳐 정부에서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가장의 명운이 한 가족의 운명을 좌우하던 때라 그 소식은 하늘이 준 기회였다. 갑표는 무릎을 치며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시험과목은 국제학과 영어, 역사였다. 통역장교로 미국까지 다녀온 경험이 있으니 영어는 걱정 없었다. 문제는 역사였다. 둘째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아직도 군인이던 남편을 대신해 그녀는 시험에 필요한 서류를 빠짐없이 챙겨 접수했다. 그런 와중에도 역사시험만을 생각했다. 둘은 외우고 문답하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만사를 제쳐두고 밤낮으로 공부했다. 마침내 시험 날, 고사장에는 유학을 갈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수험생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7명만을 뽑는 시험은 현직교수들까지 가세해 경쟁률이 무려 100대 1에 육박했다. 갑표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만 갔다. 설상가상, 교수들에게는 역사시험이 면제된다는 당일 발표는 부부를 더욱 기죽게 했다. 종이 울리자 복형은 애써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수험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나 되었을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기도로 달래던 갑표는 또 한 번 놀래고 말았다. 시험장에서 남편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쩌자고 이다지도 빨리 나오는 것인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표의 심정과는 달리 복형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자신만만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 복형은 국제 외교 부분에 당당히 합격했다. 만약에 갑표가 그 신문을 보지 않았다면 아니 신문을 봤더라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면 오늘 중남미문화원도 없었을 것이다. 중남미지역 국가들은 우리나라가 어렵고 고달팠던 시절에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나라들이다. 역사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문화의 뿌리를 가진 종족들이 약25,000년 전에 베링해(Beringovo More)를 건너 아메리카대륙으로 흘러들어 갔다. 따라서 중남미 지역의 원주민 문화는 서구의 그것과 달리 동양적이며 우리 전통문화와 같은 느낌을 주기까지 해 우리에게는 매우 친근하다. 이들 부부에게도 그랬다. 


코스타리카정부요인 서훈식(1976), 좌측 첫 번째 이복형과 다섯 번째 홍갑표


친근감에 깊고 독창적인 역사 속에서도 내전의 혼란과 경제난으로 인해 무분별하게 거리에 내몰렸던 중남미 예술품들을 문화적 안목을 지녔던 부부는 틈나는 대로 수집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미술품과 공예품들은 오늘 중남미문화원(박물관)을 있게 한 동기를 제공했다. 이복형의 은퇴와 함께 1994년 10월 7일 중남미문화원은 장엄하게 문을 열었다. 1996년에는 미술관을 2001년에는 조각공원을 조성했으며, 2011년에는 종교 전시관 등을 갖춘 복합문화공간으로 확장되었다. 외교관으로서 갖게 된 공공인식과 높은 문화의식이 더해져 재단법인으로 출범한 문화원에는 마야·아즈텍·잉카 고대문명과 스페인 식민시대 유물 3,000여 점, 각종 중남미 역사·문화 관련 자료가 집대성된 아시아 유일의 중남미 전문 박물관으로 설립 20년이 되었다.


모형


박물관 완공(1994.10.7)


30대부터 품었던 부부의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꿈을 꿔라”, “문화는 나눔이다”를 부부는 강조한다. 이미 증명하고 있는 가치이기에.


- 홍갑표(1934- ) 충남 부여 출생. 몰락한 양반 가문의 팔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경영해 나가는 법을 터득했다. 외교관이었던 남편을 따라 중남미 지역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며 그 지역 유물과 미술품을 수집해 1994년 10월 남편의 공직 은퇴와 동시에 재단법인 중남미문화원 병설박물관을 설립했다. 저서로는 『지금도 꿈을 꾼다, 태양의 열정으로』(2013)가 있다.

- 이복형(1932- ) 서울 출생, 서울고 및 동국대 법과대학 졸업했다. 미국 조지아주립대에서 수학했으며 호주 멜버른대학원 Fellow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호주 외무성 연수(1960-61),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1962), 외무부 서기관 및 의전과장(1965-66)을 역임했으며 1967년 주멕시코대사관 1등 서기관 겸 영사를 시작으로 1993년까지 중남미지역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은퇴(1993)와 함께 재단법인 중남미문화원 설립(1994)했다. (사)한국박물관협회 이사와 서울세계박물관대회 자문위원(2004), 고양문화재단 자문위원(2005)을 역임했으며 독일 및 이탈리아 등 8개국 공로훈장, 수교훈장 숭례장(1984), 체육훈장 맹호장(1996), 자랑스런박물관인상(2015)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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