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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그 섬에 내가 있었네. 김영갑갤러리두모악 김영갑

윤태석

김영갑 선생


김영갑은 1957년 충남 부여의 평범한 농가에서 7남매(6남1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영갑(永甲)이라는 이름을 직접 지어 주며, 이 아이는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릴 운을 타고났으니 잘 키우라고 손자며느리인 영갑의 어머니에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 달리 보였을까? 영갑은 유년시절부터 또래와 달리 사물에 대한 이해력과 생각이 깊어 가족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갖게 했다.
지금은 폐교가 된 내산초등학교 지티분교(부여군 내산면 지티리)를 영갑은 10리씩이나 걸어 다녔다. 계절이 변하면서 생명은 소생하고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졸졸 흐르는 개울물은 학교로 향하는 신작로 양편에 핀 꽃들과 어우러져 잔잔한 리듬의 소나타를 연상하게 했다. 6년 내내 그 길은 영갑에게 단 한 번도 같은 풍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영갑의 중학생활은 더 힘들어졌다. 집 근처에 학교가 없어 사실상 출가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웃 면(面) 소재지에 있는 홍산중학교(부여군 홍산면)에 진학하게 되면서 부모님과도 떨어지게 된 영갑은 사춘기까지 겹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친척 집에서, 이후로는 자취를 하게 되면서 외로움으로 방황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이 무렵 영갑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던 것은 기타였다. 영갑은 기타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그 음율은 불 꺼진 자취방에서도 따뜻한 온기가 되어주었다. 음악에 심취하던 영갑은 한때 가수가 되겠다고 부모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 말을 전해 듣고 어린 동생을 참 많이도 혼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제가 영갑이에게 야단치던 것을 보시던 부모님은 어린 아들이 오히려 안쓰러워 저를 나무라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집안 살림과 형제들을 뒷바라지했던 큰 형 영열은 이렇게 회고했다.


용눈이에서 두장이 겹쳐 실수한 사진


형들과 누나의 도움으로 서울의 고등학교(한양공고)에 진학하게 된 영갑은 특유의 예술적 소양이 공업계열의 학업 방향과 맞지 않음에서 온 방황으로 형제들을 애태우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고등학교를 졸업(1977년)하고 이번에는 문학을 하겠다고 신문사 신춘문예에 공모하여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2년여를 방황하다 직장에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입대하였고 긴 군 복무도 무사히 마치게 된다. 당시 집안의 대들보 같았던 큰 형 영열은 가족의 생계에 보탬이 되고자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을 위한 형의 희생은 다시 중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영갑이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가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 형이 잠시 귀국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반갑게 만난 형의 목에는 일본산 최신형 니콘카메라 한대가 걸려있었다. “ 그렇게 영갑이 돌아간 지 얼마나 되었을까? 영갑은 다시 저를 찾아와서는 카메라가 필요해서 그러니 자기에게 팔라고 하더라고요. 무엇 때문에 필요하냐고 물으니 묻지 말아 달라고 하기에 그냥 선물로 줬었어요. 그게 사진작가에 길을 가게 된 출발점이 된 거 같네요. 그리고 다시 중동에 나갔다 오니 전시회를 한다고 팸플릿을 들고 찾아오더군요.” 역시 큰 형 영열은 술회했다. 그러고 나서 몇 년 후 가족들을 놓고 영갑은 홀연히 제주도로 떠났다. 그때가 1985년이었다. 이후로는 완전히 제주도에 매료되어 사진 작업에만 매달렸고 가족들은 간간히 소식만을 전해들을 뿐이었다. 그리고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영갑은 제주도를 탐닉하고 있었다.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등 섬 곳곳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노인과 해녀, 오름과 바다, 들판과 구름, 억새 등 그가 사진으로 찍지 않은 것은 제주도에 없는 듯했다.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랬다. 섬은 김영갑처럼 외로웠고 그 고독함 속에서 평화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눈에 비친 영갑의 사진 작업은 수행이라 할 만큼 영혼과 열정을 다 바친 것이었다.
창고에서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 꽃이 피어 엉망으로 변해가던 사진들을 위해 버려진 초등학교를 구하여 갤러리로 만들고자 준비를 할 무렵, 사진을 찍을 때면 셔터를 눌러야 할 손이 떨리기 시작했고 이유 없이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카메라를 들지도, 제대로 걷지도 먹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얼마나 되었을까? 2001년 서울의 한 대학병원을 찾은 병갑은 루게릭 병(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는 판정과 함께 3년을 넘기기 힘들 거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으로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했지만 의사의 선고는 바뀔 수 없는 사실임을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다. 다시 카메라를 찾았지만 촬영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갤러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손바닥만 한 창으로 내다본 세상은 마치 기적처럼 신비롭고 경이로웠어요. 휠체어를 타더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된다면 다시 한 번 카메라를 잡아보고 싶어요.” 당시 전시를 앞두고 한 김영갑의 인터뷰는 사진에 대한 애착과 살고자 하는 절박한 심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두모악전시장



김영갑 선생 유품전시실


영갑은 점점 퇴화하는 근육을 놀리지 않으려고 손수 몸을 움직여 일에 매진했다. 불치병으로 더 이상 사진작업은 할 수 없어서 촛불처럼 타들어가는 생명과 맞바꾸며 두모악을 일구어나갔다. 이렇게 하여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 2002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그리고 투병 생활을 한 지 6년 만인 2005년 5월 29일, 김영갑은 그의 모든 것이 필름처럼 현상되어있는 두모악갤러리에서 고이 잠들었다. 그리고 그의 뼈는 사진의 망점처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두모악(한라산의 옛 이름)에 뿌려졌다. 이제 김영갑은 그가 사랑했던 섬 제주에 영원히 있다. 그리고 평생 앵글에 담고자 했던 또 하나의 피사체가 되었다.
영갑은 이 땅에 사진이 들어온 지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예술장르로 대접받지 못함을 내내 아쉬워했다. 그나마도 기성 사진작가들은 고졸학력에 전공도 하지 않은 영갑을 무시했고 그의 사진을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따라서 사진전문 갤러리를 직접 열어 맘 놓고 전시도하고 사진잡지도 내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고 싶었다. “홀로 사진을 찍고 작업을 하는 일을 수행이라 여겨왔습니다. 남이 인정하든 말든 사진을 즐겼고, 그랬기에 18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리 제주를 담을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와 고산자 김정호를 통해 고독과 소외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대화하면서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여태껏 홀로 살아온 것도 무심(無心)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습니다.”(경향신문 2002.7.30)
김영갑의 삶은 고독과 외로움으로 집약된다. 그가 간지 만 10년, 제주의 오름에서 스산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무심히 노을을 바라보고 있을 한 줌 억세 같아 애닮다.



미술관입구


- 김영갑(1957-2005) 충남 부여내산면 온해리 80번지 출생. 홍산중 졸업(1974), 한양공고 졸업(1977). 제주에서 사진작업시작(1982), 제주에 정착(1985). 김영갑갤러리두모악 개관(2002), 2005년 5월 29일 루게릭병으로 별세. ‘빛을 잃은 사람들’, 서울(1985), ‘제주의 오름’ 연작 전 총9회 개최, 제주, 대구(1986-2001), ‘동자석’, 제주(1987), ‘무덤’, 제주(1988), ‘제주 바다의 사계’, 제주(1989), ‘한라산의 사계’, 제주(1990), ‘제주도’, 러시아 모스크바(1991), ‘제주 바다의 사계’, 미국(1992), ‘제주의 사계’, 서울(1996), ‘오름, 바다. 그리고 바람이 어우러진 유혹의 섬 제주’, 서울(1996), ‘ 마음을 열어주는 은은한 황홀’서울(2001), ‘포스터’, 서울 교보문고(2001), ‘내가 본 이어도1-용눈이 오름’, 서울, 프레스센터(2005), ‘내가 본 이어도2-눈, 비, 안개 그리고 바람 환상곡’ & ‘내가 본 이어도3-구름이 내게 가져다 준 행복’, 세종문화회관(2005) 등 전시. 『최남단 마라도』(1995), 『숲속의 사랑』(1997), 『삽시간에 붙잡힌 한라산의 황홀』(1997), 『마음을 열어주는 은은한 황홀』(2001), 『내가 본 이어도 1-3권』(2005), 『1957-2005 김영갑』(2006),『마라도』(에세이집)(2010),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1996), 『그 섬에 내가 있었네』(2004) 등 사진집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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