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14)붙이고 깎고, 지금도 끝나지 않은 그들의 작품 모란미술관 이연수

윤태석

모란미술관


이연수는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0대 후반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외과 의사였던 아버지 이영종에게 연수는 여느 아버지가 그렇듯 첫딸이었기에 그 자체로 사랑의 아이콘이자 종착지였다. 적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이 마지막이었다. 건강한 편이셨지만 복잡한 수술을 끝내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잦은 과음이 이어졌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전날도 늦게까지 수술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연수 고 3때 일이었다. 늘 피로에 지쳐있던 아버지의 죽음은 고개 숙인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처럼 아이러니하게 연수에게 남아있다. 
고2,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1년 전의 일이다. 연수는 학교에서 탁구대에 부딪혀 입술이 크게 찢어졌다. 외모에 한참 관심이 많던 때, 크게 다친 입술은 그 상처를 통해 전해오던 쓰라린 고통보다 몇 배는 더 예민한 것이었다. 피를 많이 흘린 상처를 간신히 감싼 채 아버지 앞에 선 딸을 본 아버지는 너무도 태연하게, 마치 처음 본 환자를 대하듯 “다섯 바늘은 꿰매야 하겠는데?”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그 말씀이 그때는 왜 그리 섭섭했던지요?” 연수는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기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흉터, 현대의술로 감쪽같이 복원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부조( 浮彫)처럼 새겨진 것이어서 나이가 들어서도 차마 지울 수가 없었다.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아버지의 섭섭함이 만든 투각(透刻)같은 입술 흉터는 내놓을 수조차 없어 더 애닮은 아버지와의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대학 때 연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한 남학생에게 쉽게 빠지고 말았다. 지금의 남편 홍석웅이다. 그 사람에게서 일찍 여윈 아버지를 실루엣을 보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아비 없는 여건에서도 여섯 남매를 애지중지 키워내신 어머니에게 가난하고 생활력마저 갖추지 못한 어린 청년이 맘에 들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다정다감하고 배려심이 많던 그 사람과 연수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마침내 가정을 꾸리게 된다. 서로 가진 게 없는 데다 어머니의 반대마저 극심했던 터라 겨우 정릉 언덕배기에 단칸방 하나를 마련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대학졸업 후 남편은 공무원으로 임용되었지만, 현실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덩그런 방.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연수를 마음껏 아껴주었다. 자기를 믿고 결혼해준 연수에게 남편은 한결같이 잘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시간날때면 그림을 그리는 이연수 관장


연수가 그림을 알게 된 것은 둘째 아이를 낳고서였다. 어느 날 명동을 지나가는데 작은 화랑이 눈에 들어왔다. 어렸을 때 그림을 좋아했던 연수에게 화랑은 심신에 지친 사람이 위안을 얻기 위해 찾는 성당과 금당 같은 곳이었다. 그때부터 마실가듯 화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두 아이와 남편, 무료한 삶에 익숙해질 무렵이던 스물 아홉의 연수에게 화랑은 어쩌면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와도 같은 피난처였고 청량제 같은 것이어서 마냥 좋았다. 때로는 친정어머니께 아이를 맡기고 화랑을 다닐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대단한 열정이 아닐 수 없었다. “한번은 명동의 한 화랑을 갔는데, 나이 든 여주인이 그날따라 맵시 고운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의 품격 있는 자태로 중후한 중년의 한 남성화가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세련된 언사로 담소하던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다른 사람 눈도 의식하지 않고 그 장면을 연신 힐끔거렸던 생각이 납니다. 어린 마음에 나도 화랑을 차리면 작가들하고도 마음껏 차를 마실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을 향해. 여보! 나중에 돈 생기면 나 화랑 차려줘요. 그때만 해도 난데없는 소리에 남편은 허허 웃고 말았지만, 지금 그 무모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었으니 세상일은 참모를 일이다.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네요.” 이연수 관장의 술회다.

이연수 관장


그렇게 어렵게 살다 연수의 남편은 공무원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늘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던 남편의 사업은 마치 적당한 바람을 타고 마른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듯 순식간에 번창해갔다. 그리고 연수가 마흔다섯이던 해에 미술관은 현실이 되어 부부 앞에 나타났다. 남편의 사업체인 남양주모란공원과 접한 곳에 8천6백 평 조각전문미술관을 건립한 것이다. 그리고 올해로 어언 개관 25주년이 되었다. 경제적으로나 운영 면에서 개관 때부터 적자의 폭이 줄어들지 않거나 무모하게 시작한 탓에 겪게 된 숱한 난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미완의 지속인 셈이다. 그럼에도, 멋모르고 미술관을 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고 또 매 순간이 행복했으며, 파란만장한 2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스스로 대견할 뿐이라고 이연수 관장은 회고한다. “미술관을 하려면 우선은 재력이 뒷받침돼줘야 해요. 학예경력도 필요하고요. 그러나 전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했지요. 그냥 평범한 가정주부가 미술을 사랑하는 마음 한 가지만 가지고 겁도 없이 시작했어요. 개관 당시에는 열정만으로 할 수 있었어요. 그때는 일반인들이 미술관에 대한 인식도 낮았지만, 제게도 젊음과 패기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지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무모한 도전이었지요. 미술관은 문화공간이고 문화는 사람의 품격이거든요. 미술관은 돈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매우 전문적인 능력과 안목, 운영능력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돈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연수의 회고는 이어졌다.


이연수 관장 문화관광부장관상 시상식(2003). 이경성, 이춘만, 김달진 등


모란미술관에 소장된 하나하나의 작품은 1차적으로 작가들에 의한 것이지만 미술관이라는 작품은 이연수와 남편 홍석웅의 모든 것이 녹아들어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연수가 말하는 미술관의 매력과 보람은 여기에 있다. 그녀를 아는 적지 않은 이들은 연수에게 무모하다고 했다. 서울에 빌딩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건물세를 받아 편하게 살 텐데! 미술관 하면서 참 힘들게 살아왔지만 연수가 가장 가치 있게 보는 것은 미술에 대한, 미술관에서 보는, 작가와 관람자에게서 보는 보람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미술관에는 참 매력이 있잖아요!” 지난 어려움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을법한 한마디다. 
모란미술관은 연수에게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은인이다. 그래서 그녀는 가끔 미술관에게 “고맙다. 네가 나를 공부시켰어. 나를 철들게 하고 행복하게 만든 것은 바로 너야!” 혼잣말하곤 한단다. 그리고 지금은 적지 않은 기간 미술관을 감싸주고 있는 산과 들 그리고 나무,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마저 아름답게 보인다고 했다. 이 역시 미술관이 그에게 준 넉넉한 이해의 미학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 이연수(1944- ) 충남 예산 출생, 숙명여대 교육대학원 미술교육학 석사(1997), 모란미술관 개관(1990), 모란국제조각심포지엄 개최(1992). 모란미술관 청소년 미술학교 창설(1993), ‘오늘의 한국조각’ 연간 기획전 기획(1996), 인사동 모란갤러리 개관(1995), 모란미술상 제정(1995), 모란조각상 제정(1997), 현재 국내 및 국제전 150여 회 전시개최 및 창작지원, 교육사업 운영. 한국박물관협회 및 한국사립미술관협회 이사, 경기도박물관협회 회장, 경기도박물관및미술관 진흥위원, 경기도문화재위원, 경기문화예술진흥위원, 숙명여대문화재단 이사, 숙명여대 겸임교수 등을 역임 또는 재임. 남양주시장상(2000), 문화관광부 장관상(2003), 경기도건축문화상(2003) 등 수상. 모란미술관 총서001-『김복진의 예술세계』(2001), 모란미술관 총서002-『한국현대조각사 연구』(2007), 모란미술관 작품집001-『석남이 그린사람들』(2002), 모란미술관 작품집 002-『철조각의 선구자 송영수』(2003) 발간.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