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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실사구시의 실증적 실험실 전통산업박물관 권병탁

윤태석


송광매원 전경



권병탁은 안동권씨의 후예 권재수 선생의 차남으로 1929년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두리실에서 태어났다. 병탁은 유년기부터 한문공부에 심취하면서 성리학 사상에 입각한 투철한 민족의식을 함양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나라 잃은 약소민족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학문임을 자각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병탁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대구로 유학을 결심하며 6·25전쟁 중에 대구대(이후 국립경북대로 승격) 경제학과로 진학하여 경북대 경제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원 재학 중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리스트의 『국민경제학』,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등의 경제이론을 접하면서 자유민주주의적 합리주의의 사고를 갖추게 되었다. 대학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명문인 경북고등학교에 교사로 임용되어 6년간 재직하지만 1961년 교권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직되었다.



전통산업박물관 전경



그러나 평소 그의 능력을 아끼던 은사들의 추천으로 1962년 대구대 경제학과에 전임강사로 임용된 후 1994년까지 영남대 경제학과에 재직하면서 기획실장, 상경대학장, 산업경제연구소장, 경영대학원장, 학생처장 등의 보직을 거쳤다.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평생 한국산업사를 전공하면서 실증적 연구방법을 기반으로 160여 편의 논문과 20여 권의 저서를 집필하였으며, 한국경제학회, 경제사학회, 대구사학회 등의 학회활동을 하였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2005년 대한민국 학술원상으로 증명되었고 그 증거물들이 송광매기념관(현 전통산업박물관)에 유물처럼 보존되고 있다.


평소 ‘버리면 쓰레기, 모으면 자원’을 신념으로 삼으면서 자신과 관련된 물건들 외에도 남들이 무심히 여기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엄청난 수집욕을 가졌던 권병탁 관장은 매실을 주제로 전통산업과 관련된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전통산업박물관을 통해 집대성하고 있다. 권병탁 관장은 1975년에 대구시 대명동 자택에 자신의 아호를 딴 ‘추언(秋堰)생산도구연구소’를 설치하고 연구 과정에서 수집된 실증적 역사연구의자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자택의 창고와 서재에 정리된 자료들은 전통직물, 수공업과 관련된 길쌈 도구들, 각종 고문헌과 민속생활자료들이었다.


권병탁 관장은 1979년 전통도자에 대한 10여 년간의 연구결과를 수합한 저서 『전통도자의 생산과 수요』를 출판하였다. 권 관장은 그동안 한국의 전통도자기에 관한 고전기록과 기존의 선행연구에서 나타난 모든 자료를 참조하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고, 다음 두 가지 방법으로 생생한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 하나는 전국의 산야에 산재해 있는 1,000여 개의 옛 사기점 자리를 직접 답사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날 전통적인 방법으로 청자와 백자를 만들고 있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일이었다. 이 저서는 전통 도자기의 역사적, 정통적 생산방법은 소영(所營)과 민영(民營)이었고 관영(官營)은 임진왜란 후 잠시뿐이었다고 주장한 저서이며, 전통도자수공업은 다른 전통 수공업과는 달리 근대산업으로 승화되었음을 논증한 연구서라는 특징이 있다. 전통도자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집된 각종 도자기자료는 추언생산도구연구소의 소장 자료를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한편, 1980년 6월에 우연히 방문한 순천 송광사에서 야생 씨매실 씨앗을 입수하여 자택 텃밭에서 첫 싹을 틔웠으며, 이후 1983년에는 달성군 화원읍 설화리에 ‘권병탁씨매실농원’을 개원하여 매실보급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전통 매실의 효능에 매료된 권 관장의 관심은 약령시에 대한 학술연구로 발전했다. 



송광매원을 찾아온 제자들과 함께, 맨 좌측이 권병탁 관장, 1996



1984년부터 대구 약령시와 관련한 일련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면서 약령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였다. 권병탁 관장은 그의 논문 「대구 약령시의 보건 경제사적 고찰」에서 약령시가 대 청(청나라) 조공용 약재 조달을 위하여 국왕의 명령으로 창시되었다는 이른바 ‘명령설’을 부정하면서,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요구로 개설된 ‘춘추의 계절시’였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권 관장은 송광매보급운동본부를 발족하여 매실의 효능을 홍보하는 동시에 농원에서 직접 기른 매실 묘목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또한, 1982년에는 부인 송수희 여사와 동행한 유럽여행 기간에 대영박물관과 루브르박물관 등 유럽의 유명 박물관들을 둘러보면서, 자신이 수집한 소중한 자료들로 박물관을 건립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된다. 정년퇴임을 앞둔 권 관장은 1992년 대구시 동구 덕곡동에 송광매원을 개원하며 본격적으로 박물관 건립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게 된다. 


1994년 8월, 영남대를 정년퇴임한 이후 송광매원에 초막을 손수 건립하여 기거하면서 자택에 소장 중이던 각종 유물자료를 본격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했으나 불법건축물 철거문제 때문에 송광매원에서의 박물관 건립이 무산되어, 이 때문에 낙담하여 건강마저 악화되면서 매실 보급과 박물관 건립에 대한 꿈을 접고 대명동 자택으로 되돌아와 수년을 은거하였다.


그러나 박물관 건립에 대한 의지를 포기할 수 없어 고민하던 중 2002년에는 문화관광부에 전통산업을 테마로 한 ‘송광매기념관’을 등록하였고, 마침내 2003년에는 송광매원에 현재의 박물관을 건립하게 되었다. 사립박물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던 당시만 해도 자연녹지지역에 박물관 건립허가를 받기는 쉽지 않았지만, 건축학을 전공한 3남의 도움으로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의 박물관이 완공되었다. 송광매기념관에는 송광매에 관한 자료 외에 그동안의 연구업적과 자료들을 길쌈방, 쇠부리방, 도자기방, 약령시방, 생활자료방과 염색연구자인 부인 송수희 여사의 각종 수상작품을 전시한 국원예방, 전통염색방 등으로 구성된 전시실이 구축되어있다. 기념관은 매년 봄 매화꽃잔치를 위시한 각종 공연과 특별 전시들을 개최해오면서 지역의 문화적 명소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권병탁 관장은 추언생산도구연구소를 개소한 지 40주년이 되던 2015년에 접어들면서 송광매기념관의 운영을 3남인 종욱(영남대 건축학부 교수)에게 인계하고 박물관의 명칭을 ‘전통산업박물관’으로 변경하였다. 같은 해에 전통산업박물관은 ‘전통 건축도구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전통산업박물관으로서의 영역을 더욱 확대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박물관의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고 있다.


“일제 식민지 당시 일본인들이 ‘너희 민족은 철을 만들지 못하는 원시민족이다’고 가르쳤는데 훗날 대학에 가보니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권 관장의 회고. 그가 쇠부리가마, 무질부리가마 등의 시설을 박물관에 재현하게 된 배경이다. 전통산업박물관이 실증의 실험실인 까닭이다



- 권병탁(權丙卓, 1929- ) 경북 성주출생. 경북대 경제학 학사(1953), 석사(1955), 박사(1969). 경북고 교사(1955-61). 영남대 경제학과 교수(1962-94), 경제사학회 회장(1985-86), 현 영남대 명예교수, 전통산업박물관 명예관장. 저서로는 『한국경제사 특수연구』(1972), 『전통도자의 생산과 수요』(1979), 『게라마열도(일제말 징용기)』(1982), 『일반경제사』(1983), 『한국경제사』(1996), 『천리마』 (경제사상총서,1996), 『탁아! 감자캐러 가자』(2002), 『한국산업사연구』(2004), 『매화록』(송광매기념관, 2008). 경상북도문화상(1975), 한국경제학상(1983), 다산경제학상(1986), 대한민국 학술원상(2005)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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