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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다시 교편을 잡다 덕포진교육박물관 김동선·이인숙

윤태석


1996년 박물관 개관 당시 김동선, 이인숙 부부


김동선은 1941년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서 9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나 덕수국민학교를 다녔다. 6·25 한국전쟁으로 부모님을 따라 대구로 피난을 떠난 동선은 연합군의 서울 수복 후 상경하게된다. 그러나 고만고만한 형제가 많은 데다 어린아이는 한강을 건널 수 없다는 군의 방침에 따라 부친의 고향인 김포군 양동면에 정착하게 된다. 양천국민학교를 다니게 된 동선은 이때 처음으로 농촌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부친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를 졸업하고 방직공장을 경영하였는데, 평소에 우리 문화재에 관심이 많아서 도자기, 고서화, 화폐, 우표 등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소장품은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분실되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영국군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쳐 도자기며 서화류 등을 약탈해 가던 장면은 아직도 동선에게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1959년 경기공고를 졸업할 당시 아버지의 방직공장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도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집안이 어려워진 동선은 기계공장, 인쇄소 등 생활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동선은 언제부턴가 교사가 되고 싶었다. 대학진학을 꿈꾸며 낮에는 기계소음이 가득한 공장에서 일했고 저녁에는 학업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때마침, 서울사범학교가 서울교육대로 승격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야심 차게 입시에 응하게 되었다. 행운이었을까, 꿈에 그리던 합격의 영광을 거머쥐게 된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부터 서울 당중국민학교를 시작으로 교단에 서게 되었다.


6·25전쟁 이후 교육계에서는 반공, 승공(勝共), 멸공, 충효,새마을운동, 윤리, 국민정신, 오애(五愛: 국기, 국가, 국화, 국어, 국토) 등 이념교육이 크게 강조되었다. 시대상황을 잘 인식하고 교사관이 투철했던 김동선에게도 이 분야는 큰 관심의 대상이 었다. 이 무렵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이념교육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깨달음이 계기가 되어 사회교육 전공으로 1969년 연세대 교육대학원에 진학하게 되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박물관대학과 한국문화의집의 전통문화교육 등을 수강하면서 문화에 대한 안목을 키워나갔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석조전 앞에서 김 관장 가족, 1972


특히, 국가안전기획부의 남북교류전문가과정을 수료하여 「남북한초등교육과정 비교 연구」로 최우수 논문상을 받고 전국 교사 연수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때의 박물관 현장학습을 위한 사전·사후 학습 자료는 서울시교육연구원에서 책자로 출판되어 각 학교에서 활용되였다.

이처럼 박물관 활동에 관심을 두게된 것도 어렸을 적 부친의 문화재 사랑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그의 아내 이인숙은 동심의 세계에 뿌리 깊은 나무를 심어보겠다는 일념으로 이화여대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1993년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중 불의의 사고로 시신경을 다치게 된다. 그 후유증으로 눈이 침침하고 상이 흐리게 보이는 증상이 계속되어 이를 고치기 위해 3년간이 나 크고 작은 병원 등을 찾아다니며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결국 실명에 이르게 되었다. 실명 판정을 받기 전 다시는 교단에 설 수 없다는 생각에 동선은 아내와 함께 학교에 사표를 제출하게 된다. 

“본인이 계속 다니겠다는 의지가 있는데 왜 남편이 사표를 제출하느냐?”며 교장선생은 완강히 만류했으나 아이들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변할 수는 없어 결국, 교단을 떠나게 되었다. 천성이 밝고 적극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던 이인숙은 실명에다 하루아침에 20여 년간 서왔던 교단에서 내려온 채, 혼자 집에 갇혀있게 되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절망이라는 단어가 차라리 사치스러운 암울한 수렁이었다. 무엇보다도 천업(天業)과도 같았던 교단에서 더는 아이들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차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로, 자멸감으로까지 번지게 하는 아픔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던 절체절명의 순간, 중학교에 다니는 둘째 아들의 담임교사로부터 학교에 잠깐 나와 달라는 전화가 왔다. 동생에게 의지해 학교에 간 인숙에게 던진 담임교사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선생님! 앞이 안 보이는 제 어머니 좀 살려주세요. 어머니를 생각하면 공부도 할 수 없고 앞이 깜깜합니다” 시각장애인이 된 후 괴로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절절히 담아낸 아들의 편지였다.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본인의 장애로 인해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깊은 실의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힘없이 학교를 빠져나오는데 남편과 자식들 그리고 20여 년간 가르쳤던 제자들의 얼굴을 떠오르며 하염없는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시 살아야겠다는 용기와 희망을 품게 되는 순간이었다.


박물관 개관 당시 훈장선생님으로 분장한 김동선 관장


그 일이 있은 후 동선은, 아내가 다른 세상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 주어야 하는 소명이 생겼다. 이것이 오늘날 덕포진교육박물관을 설립하게 된 동기다. 이는 박물관 강좌 등을 통해 우리 문화재에 담겨 있는 조상들의 기상과 얼을 인식하게 된 데다 평소, 교육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그 최적지가 박물관임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한, 아내의 교직 경륜이 박물관에서도 분명히 빛을 발할 것이라는 믿음이 전제되었다.

박물관에 아내만의 공간인 옛날 교실도 만들고 서당에서부터 일제강점기, 1-7차 교육과정까지의 교육사의 흐름을 알 수 있는 전시공간도 머릿속으로 구상해보았다. 교과서, 학용품, 교구, 교복 등을 바탕으로 삶의 원동력을 찾고자 실행해 옮기기로 했던것이다. 하지만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예산과 장소가 문제였다.

우선 살고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퇴직금과 부친으로부터 받은 약간의 유산을 확보하였다. 첫 번째 관문은 박물관의 입지였다.수소문 끝에 고향인 김포 덕포진(德浦鎭) 사적지가 눈에 들어왔다. 덕포진은 신미·병인양요의 격전지로 당시의 대포도 발굴되었고 청소년수련원도 위치하여 역사교육도 병행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는 생각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파트가 팔려 아내와 가족들은 친척집을 전전해야 하는 고난 속에서도 박물관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물관이 생겨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아내의 불안감과 주위의 만류, 가족들의 불만까지 이어졌지만, 김동선은 흔들리지 않고 우직하게 일을 진행해 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3년간의 준비 끝에 덕포진 사적지 바로 앞에 마침내3층 400평 규모의 박물관이 들어섰다. 그리고 드디어 1996년 6월 8일 덕포진교육박물관이 문을 열게 되어 김동선이 그토록 바랐던 아내 이인숙을 위한 교단이 완성되었다.


김동선(金東銑, 1941- ) 경기공고 졸업, 서울교육대 졸업(1964), 국제대 정경학부 경제학 전공 졸업, 연세대 교육대학원 교육학 석사. 서울 당중초 외 9개교 교사(1964-91),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연구위원(1991-94) 역임. 국무총리상(1996), 대통령상(2004), 자랑스런 교대인(2005), 자랑스런 박물관인상(2009) 수상. 현 덕포진교육박물관 관장(1996- ).

이인숙(李仁淑, 1947- ) 진명여고 졸업, 이화여대 사범대 교육학 전공 졸업. 서울 연희초 외 5개교 교사(1970-93) 역임. 경기도지정테마박물관 선정(1996), 고려대 문화최고위과정 초청강연(2007), 여성시각장애인협회 초청 강연(2008). 자랑스러운 진명인상(2002), 아름다운 이화인상(2014) 수상. 신문 및 방송에 100회 이상 출연, KBS인간극장 ‘풍금소리’의 주인공(2013.12-2014.1). 현 덕포진교육박물관 관장(19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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