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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고난에서 피어난 문화예술의 변주곡 향암미술관 주수일 관장

주수일

미술관식 개관(1999.7.30)

계곡과 숲, 시냇물, 산새, 철 따라 피는 꽃. 이 신비로운 자연의숨소리들은 어린 주수일에게 늘 신비감을 주었다. 그는 역사가 깊고 구릉성 산지가 넓게 분포한 경북 김천 지례면(知禮面)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던 소작농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산과 들,강을 따라 십리 길을 걸어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 평소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수일은 눈 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자연의 광경을 보면서 언젠가는 꼭 그려보리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

오늘날 작가 주수일의 작품경향이 전원적인 것에 천착 되어 고향 집의 토담, 들, 돌, 물줄기, 벽돌로 된 담벼락, 신비에 담긴 거미줄 등의 소재에 집중된 점과 번짐과 같은 기법에서 드러나는 이끼 냄새 역시 여기에서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향토색 짙은 자연이 염료처럼 스며든 것은 그의 고향 지례면이 신라 시대부터 ‘깊다·짚다’를 뜻하는 ‘지품(知品)’, 즉 골과 물웅덩이가 깊은 지역이라는 지품천현(知品川縣)으로 불리었던 역사적 사실과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본다. 이 같은 환경이 유·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낸 주수일의 정신에 암각화처럼 새겨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 초등학교 3학년 미술 시간에 선생님은 수박을 그려보라고 하셨다. 가난한 농가에서 자라나 수박을 먹어보기는커녕 둘째 형의 교과서에서 흑백사진으로만 보았던 수박을 기억과 상상력으로 표현한 수일의 수박은 선생님의 눈에 띄어 교실 뒷벽에까지 걸리며 극찬을 받는다. 이 일을 계기로 그림에 더욱 흥미를 갖게 된 수일은 본격적으로 미술부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실기대회에서 크고 작은 상을 받게 되면서 화가의 꿈이 수묵처럼 번져가게 되었다.

원로중진작가 초대전(2008)

그러나 뜻밖에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게 되면서 꿈은 현실의 두꺼운 벽에 막히고, 그림공부는 고사하고 우선 생활비와 학자금마련부터 답답해졌다. 주경야독의 막막한 가시밭길이 시작된 것이다. 농사일, 점원생활, 신문팔이, 연필장수 등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품팔이했다. 역 대합실과 열차의 객실은 지친 소년의 하룻밤 숙소가 되어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림의 꿈을 버릴 수는 없었다. 종이 살 돈이 없어서 한겨울 찬바람을 막기 위해 사온 창호지에 그림을 그렸고 그 그림을 방문에 붙이니 자연스럽게 병풍이 되었다. 그림이 그려진 방문에 햇볕이라도 밝게 비칠라치면 그림 속 풍경은 생명을 머금고 살아나 그의 꿈도 덩달아 밝아지는 듯해 좋았다.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그림의 꿈을 펼치기 위해 맨 처음 찾아뵌 분이 이미 전통회화의 대가 반열에 올라있던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수일은 선생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다는 뜻을 몇 차례 밝혔고, 수일의 됨됨이를 차츰 알아본 소정은 사제의 정을 나눠보자고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그 후 서라벌예대(현중앙대) 미술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면서 그는 또 한 명의 정신적인 지주를 만나게 된다. 연정(然靜) 안상철(安相喆, 1927-93) 선생이었다. 대학에서 직접 가르침을 주신 두 분은 전통회화의 기본기에 충실해야 함은 물론 사물을 따뜻하게 보아야 함과 작가이기 이전에 참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늘 몸소 보여주셨다. 나보다 못한 이를 배려하고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오늘날 그가 미술관을 건립하는데 가장 큰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었던 행운은 내가 가난으로 인해 겪었던 고통에 대한 큰 보상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당시 그 스승들보다 더 늙어버린 제자는 술회했다.

이때부터 주수일은 지나간 발자취와 스승들의 가르침을 반추 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고 이를 나누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이후 어렵게 학업을 마치고 교편을 잡으면서부터 막연하게나마 미술관 건립이라는 큰 꿈을 갖게 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그 꿈을 이루고자 마음을 먹고 나니 현실에 앞서 우선 가슴이 벅차고 미칠 것처럼 흥분되기도 했다. 미술관 부지를어릴 적 기억이 필름처럼 선명한 고향 김천(금릉)으로 정하고 그때부터 하루 몇 번씩 적금통장을 펴보며, “이 돈 가지고 될까? 아니야! 미술관을 설립한다면 고향에서 땅을 헐값에 내줄 거야. 전답이나 길가보다는 야산 같은 곳이 싸겠지?” 별생각을 하면서 스케치하러 다니듯 고향 땅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그 희망도 잠시,미술관을 한다고 하자 대단한 자산가가 땅 투기나 하러 온 냥, 시세보다 훨씬 더 비싼 값을 부르곤 했다. 고향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종국에는 김천행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학생실기대회 시상식

큰 절망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돈이 문제였다. 이후 더 알뜰하게 생활비를 절약해야 했고 해마다 개인전을 열어 그림으로 산 돈까지 모아 오던 중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전해져왔다. 장인어른이자 평소 예술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시던 교육자 겸 시인 황능곤(黃能坤) 선생께서 동해 백암온천 앞자락의 산 중턱에 부지가 있으니 미술과 문화가 취약한 지역에 미술관을 건립해 보라면서 소유하고 있던 선산 2,000여 평을 미련 없이 내주셨다. 이렇게 하여 지방미술인 저변확대와 지역 미술문화 창달에 기여하자는 거창한 목표를 세우고 미술관 건립의 첫 삽을 뜨게 되었으며, 그간 모아왔던 돈과 전 재산을 털어 넣은 후에야 그의 아호 향암을 단 미술관이 탄생(1999)할 수 있었다. “이런 기회를 주신 장인어른은 내게 또 다른 스승이지요. 지금까지도 이 못난 사위를 위해 큰 바위처럼 절 지켜주고 계신답니다.” 주수일 관장은 그간의 과정을 회고하며 덧붙였다.


대구경북미술작가 초대전(2016)

향암미술관은 문화예술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에 있지만, 사립미술관으로는 보기 드물게 상당 수준의 국내외 작가 작품 8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백암온천을 방문하는 관광객과 주변에 산재한 기업 연수원의 연수생들에게 미술품 감상과 체험의 장이 되고 있으며,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 나눔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국내 유명작가도 유치하여 매년 특별 기획전도 개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지역민과 작가가 소통하여 화합하는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이처럼 향암미술관은 단순히 보여주는 공간에서 벗어나 지역 문화의 거점으로 거듭나기 위해 지역사회에 부합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동해의 자연 그리고 백암온천단지와 어우러져 지역의 문화향유 고양과 교육가치 창출, 관광 시너지 극대화에도 기여하게 되었다.

어둠을 밀어내며 밝아 오는 미술관의 아침. 물소리, 바람 소리,이슬을 살짝 얹은 꽃잎 같은 청량한 산새 소리. 주수일이 걸어온 길을 닮은 듯해 미술관은 찾는 이들에게는 늘 고향 같다.


- 주수일(朱秀一, 1941- )
경북 김천 출생. 아호 향암(鄕岩). 서라벌예대, 계명대 대학원 졸업. 향암미술관설립관장, 인천대 명예교수, 미술과 비평운영위원장, DBS동아방송 고문, 대입학력고사 출제·심의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작품수집 심의위원장, 국제기능경기대회(미술)출제·심사위원(1997-99), 제31회 대한민국미술대전운영위원장 및 조직·운영·심사위원·초대작가, 전국대학미전 집행·운영·심사위원장, 12개 광역자치단체등 전국단위 미술대전 운영 및 심사위원장, 대한민국 아트페스티벌 2012운영위원장 역임. 녹조 근정훈장, 문화상(한국미술), 교수학술 연구상 수상. 독일프랑크푸르트 시장초청 ‘한국화’전(1973), 개인전27회. 논문 「조선후기 문인화에 관한 연구」,「한국 현대채색화 표현방법 연구」.『 한국현대화 명감』(1,2권),『 한국회화100년의 궤적』,『 주수일의 오브제』 등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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