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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박물관에 사는 아저씨가 되지 못한 남자, 김우림 관장

윤태석

고려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특별전’ 동궐도 앞에서 (2001.5)


소년은 고교 시절 어느 가을밤에 군집한 잠자리가 누구 하나 흐트러짐 없이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신기한 장면은 내내 뇌리에 남아 잠자리의 귀향성(歸向性)을 연구하는 생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어려운 집안 형편과 일곱 살, 열네 살 터울의 형들이 늦둥이 막냇동생을 걱정하며 취업이 한결 쉬운 이과를 선택할 것을 종용한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소년은 서울의 모 대학 생물학과에 응시한다. 소년처럼 죄다 잠자리만 보고 왔던지 그해 따라 경쟁률은 급격히 올라가 낙방하고 만다. 소년은 재수를 시작하며 잠자리를 자신에게 빗대, 내가 향할 곳(귀향처)은 어디일까를 숙고한다. 그리하여 잠자리를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사람을 연구하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평소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막내에게는 이과 선택을 권유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은 줄곧 인문과 예술 분야에서 일해 왔던 형들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문과로 전향한 소년은 그해 고려대학교 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장과 울산박물관장,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장을 역임한 김우림의 이야기다. 졸업과 함께 김우림은 대학원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사정상 바로 진학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때마침 학교박물관에서 학예사를 채용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천신만고 끝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박물관에 몸을 담게 된 김우림은 특유의 친화력으로 전시를 기획하고 구현하는 학예사로 빠르게 적응해 갔다. 1934년에 문을 열어 우리나라 대학박물관의 효시 격인 고려대학교박물관은 그 역사만큼이나 고고미술, 서화, 도자기, 목가구, 근현대역사자료, 현대미술 분야에서 탄탄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우림은 더욱 활기차게 임무에 임할 수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 관람객 100만 돌파 기념 선물 증정(2007.11.23)



2004년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그가 기획한 주요 전시를 보면, 고려대학교 개교 95주년을 기념해 2000년에 개최한 ‘20세기 한국미술 200선 展’, 한국 미술사에서 최고의 기록화로 손꼽히는 <동궐도(東闕圖, 국보 249호)>를 일반에 최초로 공개한 ‘조선시대 기록화의 세계 특별전’(2001), 430년 만에 긴 잠에서 깨어난 ‘병인윤시월-파평윤씨 모자 미라 특별전’(2003) 등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주최한 미국 6개 대학 순회전 ‘조선시대 선비의 묵향(墨香): The Fragrance of Ink’(1996)는 17년간 재직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전시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대학박물관에서는 쉽지 않은 대형 전시를 기획해 그때마다 큰 반향을 일으킨 영향에 힘입어 43세의 젊은 나이에 김우림은 파격적으로 서울역사박물관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곳에서도 김우림의 진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휘되기 시작한다. 일본민예관과 협업으로 추진한 ‘반갑다! 우리 민화전’(2005), 중국 한당(漢唐) 시기의 고대 문화를 소개한 ‘중국국보전’(2007) 등이 그것이다. 

박물관 역량 강화에도 노력했다. 박물관에서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었음에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체계가 빈약했다. 우선, 자체적으로 교육 TF팀을 과감하게 신설하여 학생과 시민들에게 양질의 교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춰 나아갔다. 이에 멈추지 않고 급기야는 시장 독대를 통해 박물관의 대세는 교육임을 피력해 ‘교육대외협력과’를 신설했다. “제가 울산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을 때도 서울시와 똑같이 시장님과 독대해 교육 전담과를 신설할 수 있었습니다. 새로운 과(課)의 신설은 증원과 함께 다른 행정기관에서 1개 과를 폐지해야만 가능한, 대단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따라서 시장님들도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이 자리를 빌려 당시 이명박 시장님과 울산시 박맹우 시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김우림 관장의 말이다. 교육전담부서의 신설에 따라 증원이 필요해 ‘교육사(Educator)’를 공채했다. 우리나라 박물관에서 ‘교육사’라는 직함의 전문가를 채용한 것은 서울역사박물관이 처음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 ‘음악이 흐르는 박물관의 밤’ 음악회에서 사회를 보는 김우림 관장 (2007.12.7)


또한, 김우림은 ‘시민에게 사랑받는 박물관’을 캐치프레이즈로 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일환으로 ‘음악이 흐르는 박물관의 밤’이라는 음악회를 신설한다. 매달 셋째 주 금요일 밤 관내 로비에서 진행된 음악회의 사회자는 다름 아닌 김우림이었고, 간간이 관객들의 요청이 있을 때면 초대가수가 되기도 했다. 음악회는 인기가 더해지며 초기 평균 관객 200명에서 나중에는 1,000명을 넘어서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한번은 제가 사회를 보면서 ‘남자는 정열을 잃으면 아저씨가 되고 여자는 꿈을 잃으면 아줌마가 됩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에 울림이 있었던지 박물관 자유게시판에 ‘서울역사박물관은 아저씨가 되지 못한 남자가 관장님으로 있는 곳’이라는 한 여성의 글이 올라와 한동안 상념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김우림 관장의 술회다. 이러한 노력으로 관람객 역시 큰 폭으로 늘어 서울의 3대 박물관이라는 찬사를 듣게 되었다.


울산박물관 개관 기념, 직원들과 함께 (2011.6.22)


김우림은 성공적인 임무를 마치고(2009) 울산박물관건립추진단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2009) 개관과 함께 초대 관장으로 부임(2011)한다. 그는 먼저, ‘시민이 만드는 박물관, 시민이 참여하는 박물관, 시민에게 사랑받는 박물관’을 모토로 설정하고 ‘울산박물관 유물수집 및 관리 조례’를 제정한다. 이를 통해 시민과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유물 기증 환경을 조성하고 대대적인 기증 운동을 벌여, 개관 초기 자료가 부족했던 박물관에 지역성이 내재된 보석 같은 다수의 유물을 확보하게 된다. 현대자동차의 포니 두 대도 이때 수집된 유물이다. 개관 기념 ‘대영박물관 특별기획전’(2011)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촉발된 ‘개관 1주년 기념 기증유물특별전’(2012),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공동으로 개최한 2012년 가을 특별전 ‘조선시대 문인화의 세계’ 등 김 관장이 기획한 전시는 국제, 시민참여, 외부 협업의 의미까지 더해 문화의 불모지 울산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며 관심을 끌어모았다. 또한, 일반 시민과 대학생이 참여하는 자원봉사 관람 안내 시스템을 구축했다. 자원봉사자에 대한 철저한 관리와 교육으로 관람객들의 만족도는 높아갔고 그럴수록 자원봉사 희망자도 늘어만 갔다. 급기야는 필기시험에 면접까지 치러야 할 정도로 치열한 경쟁률을 보였다. 이 소문은 시장의 귀에도 들어가 이들에게 국내 박물관으로는 파격적인 수당까지 지급할 수 있게 되었다. 관람객 서비스의 선순환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몇 년 전, 제집 옆에 어떤 가족이 이사를 왔는데, 고등학교 교사인 그 집 따님이 저를 보더니 ‘어머! 제가 중학교 때 음악회에서 뵈었던 그 관장 사회자님이 우리 옆집에 사시네요.’ 하며 놀랍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저를 알아봐 주니 참 행복했습니다.” 김 관장이 서울역사박물관장으로 있을 때 모 신문에서는 그를 박물관 계의 ‘마이다스 손’이라는 애칭을 부여한 적이 있다. 그만큼 혁신과 파괴로 박물관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 온 그는 박물관 맨 이자, 학문적으로는 조선시대 사대부 묘제의 최고 권위자로 어느 여교사의 이웃집에 살고 있다.


- 김우림(金右臨, 1961- ) 민속학박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장, 울산박물관장, 울산시박물관건립추진단장, 서울역사박물관장, 고려대학교박물관 학예사·학예 과장, 서울시 및 경기도 문화재위원, 서울시문화재위원회 기념물분과 위원장, ICOM 2004 서울대회 상임위원, 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수상(2008), 캄보디아 문화금장훈장 수훈(2005), 러시아 국립톨스토이박물관 명예회원(2005). 『조선시대 사대부 무덤이야기』(민속원, 2016)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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