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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호기심 천국, 나이를 잃어버린 청년- 은암미술관 채종기 관장

윤태석

대학 재학시절 야외 스케치


채종기의 부모님은 두 분이 모두 교사였다. 전남 보성에 있는 한 초등학교 관사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소나기가 내리는 여름철이 유독 무서웠다. 후드득 빗소리도 그랬거니와 관사 지붕이 양철이어서 어떤 때는 자갈이 쏟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이불 속으로 숨기 바빴고 이를 본 엄마는 무심히 이리저리 집안일만 보실 뿐 겁쟁이 아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그래도 총탄처럼 내리꽂는 소낙비가 그치지 않으면 엄마가 있는 부엌으로 뛰어가곤 했다. 엄마 곁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였다. 부엌 흙바닥은 울퉁불퉁했고 튀어나온 부분은 설렁탕집 솥뚜껑처럼 반질반질했다. 아궁이 좌측 편에는 지붕을 뚫고 감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감나무가 어떻게 지붕을 뚫었을까? 감잎에 맺힌 빗물은 왜 연초록으로 변했을까? 감나무 기둥은 빗물을 흡수해 색은 더욱 짙어지고 미끈거렸다. ‘붉은 양철지붕’, ‘소나기 소리’, ‘부엌의 새까만 흙바닥’, ‘연초록 빗물과 감잎’, ‘지붕 뚫은 감나무가 있던 관사’에서의 어린 추억은 채종기에게 상상력과 호기심을 마르지 않게 한 샘터였다. 

광주에 있는 은암미술관이 채 관장이 일하는 곳이다. 


‘꺼먼(검은) 것은 먹이요, 흐컨(흰) 것은 종우(종이)라’ 채 관장이 서당 다닐 때 글을 읽다가 버벅대기라도 하면 훈장님이 혼내시며 하시던 말씀이다. 

채 관장은 수년 전 미술관에서 조선시대 양명학자(陽明學者)이자 조선 서예사의 이론적 체계를 구축해 원교체(圓嶠體)를 완성한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서예 특별전’을 우여곡절 끝에 개최한 적이 있다. 유년 시절 서당 출신으로서 이순(耳順)을 넘긴 나이에 본인도 한자체를 잘 모르는데, 암호처럼 생긴 초서를 직원들이 어찌 알겠는가? 아무튼, 서당 출신답게 용기를 내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서예전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채종기의 서예에 관한 관심은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성군 복내면 반석리 그가 살던 마을 아랫집에는 인근에서 마지막 유학자라고 불리던 안종선(安鍾宣)이라는 분이 서당을 하고 있었다. ‘갓쟁이’ 집안으로 불리던 훈장님은 채종기의 친구 할아버지였다. 


어느 날 어린 채종기는 아버지와 숙부의 손에 이끌려 서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서 커다란 붓으로 신문지에 천자문을 쓰던 중 훈장님의 등 뒤 맹종죽(孟宗竹)으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진 기다랗고 커다란 나무 궤짝 하나를 보게 된다. 두꺼운 통나무 판으로 만들어 꽤 묵직해 보이던 그 검붉은 색의 궤짝이 어린 채종기의 신경을 자꾸만 거슬리게 했다. 잠시 쉬는 시간에 친구에게 “너의 할아버지 등 뒤 위에 있는 궤짝은 뭐냐? 왜 거기에 있는 거냐?”고 물었다. “아! 그거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들어갈 관(棺).” 채종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까지 더듬거리며 친구에게 다시 물었다. “니네 할아버지는 무섭게 관을 왜 짜 노셨다냐? 아직 건강하신데”, “아! 그건 미리 관을 준비해 놓으면 오래 사신다고 해서 동네 목수한테 맡겨 짜 놓으신 거야.” 옻칠까지 해 검붉은 빛까지 돌던 관에서 갑자기 뚜껑을 열고 피로 범벅된 송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갈하게 의관을 한 대쪽 같은 훈장님은 채종기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자문 가르치기에만 열중하셨다. 그렇게 천자문 첫날은 공포와 긴장감으로 길고 길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후로도 채종기는 한자 공부를 하는 동안 자력(磁力)에 끌린 쇳조각처럼 주기적으로 고개를 들어 붉은 관을 올려다봐야만 했다. 어쩌다 훈장님과 눈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더 놀라 고개를 떨궜지만, 어떤 때는 그런 훈장님이 관에서 나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리 장수를 기원하는 미신이라고 해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광에다가 숨겨놓을 일이지 왜 글방에 두었는지 채종기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제자들이 졸지 말라고 그러셨나? 서당에 가는 날이면 이미 등골은 빳빳해져 있었고, 일부러 채종기는 천자문에 집중해 관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애를 쓰곤 했다.


프랫 인스티튜트대학원 졸업식(1994.5)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필자는 채종기 관장으로부터 이 관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필자가 아는 채종기 관장은 이처럼 감수성이 풍부하며 호기심 많은 사람이다. 그는 청소년기에 성장이 멈춘 듯 맑고, 티가 없으며 머리 굴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다. 늘 웃는 얼굴로 분위기를 밝게 이끌어 주어 그와 함께 있으면 한결 기분이 좋아진다. 늙을 줄 모르는 청년 채종기 곁에는 그래서 늘 젊고 활력있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가끔 뵙자고 하면 고령의 모친을 돌볼 사람이 없어 오늘은 안 된다고 말하는 효자이며 단호한 결단력을 갖추기도 했다. 


10년 전쯤에 필자는 채 관장과 ‘미국박물관연맹 연례회의와 뮤지엄 엑스포(American Alliance of Museums Annual Meeting & Museum Expo)’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 출장길을 함께한 적이 있다. 필자보다 거의 띠동갑에 가까울 만큼 윗 연밴데도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으로 그는 많은 걸 알게 해주었고, 출장 8일 동안 같은 방을 쓰면서 한시도 심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채 관장은 미술교육을 전공하고 도미해 뉴욕에서 Master of Fine Arts를 마친 후 아이오와대(The University of Iowa) 미술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귀국 후에는 대학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광주비엔날레 전시부를 거쳐 한국도자재단(옛 세계도자엑스포) 전시 과장으로 재직했다. 이때 그가 주도한 전시기획 활동의 대부분은 국제적인 행사였다. 이후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으로 자리를 옮겨 미술관 최초의 블록버스터급 ‘루벤스 전’을 성사시켰으며, 이를 기획한 공로로 장관상(우수기획)을 받기도 했다. 



은암미술관 광주비엔날레 중국파빌리온전 개막식(2023.4)


미술관에서 배양한 뮤지엄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은암미술관 관장 자리에 오른 채종기는 광주비엔날레 협업전, 한중수교 30주년 기념전, 한·베트남 특별전, 제40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전 등을 기획했다. 중견 건설업체가 설립한 미술관이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전시다. 


채 관장은 칠순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다. 그는 서울과 광주를 비롯한 미국과 중국(북경, 충칭), 브라질 등에서 열네 번이나 개인전을 가진 바 있는 작가 출신의 미술 기획자 겸 미술관 경영자다. “제가 미술관을 이렇게나마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기 때문입니다.”, “관장님의 그 사교성과 예술가적 기질은 어디서 온 건지요?” 필자가 묻자. “제게 사교성과 예술적 기질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건 예능에 소질이 남다르셨고 사교성도 뛰어나셨던 어머니의 영향 때문일 겁니다. 그러던 어머니께서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계시니 걱정입니다.” 인터뷰가 길어지자 어머니를 돌보러 가야 한다며 특유의 미소를 띠며 자리를 떠났다. “참! 다음 주에 맛 좋은 막걸리 사 들고 갈 테니 한잔합시다.” 다시 문이 열리더니 그 틈새로 채 관장의 쾌활한 목소리가 파고든다.



- 채종기(蔡鍾基, 1955- ) 전남대 사범대학 미술교육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석사), 프렛 인스티튜트대학원 졸업(M.F.A: Master of Fine Arts), 전남도립미술관 작품수집평가위원, 전주시립미술관 건립추진위원, 아이오와대 미술대학 연구원(미국), 한국도자재단 전시 과장,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사)동아시아미술교류협회 이사, 광주박물관·미술관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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