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
1975년 가을 홍종명 선생과 박고석 선생의 도봉산 산행에 나도 동참한 적이 있다. 박고석 선생은늘 혼자 다니셨는데 이례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다. 홍종명 선생이 새로 산 등산화를 처음 신고 왔다며 자랑하는 걸 조용히 듣고 있던 박선생은 홍선생의 모자를 벗기며 산 아래쪽에 던졌다, 그리곤“야 종명이, 내려가서 얼마나 빨리 올라오나 시험좀 하야 갔어, 빨리 모자 개져와보소!” 새로 산 신발이 얼마나 더 좋은가를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다.왜냐하면, 내가 대신 내려가려니까 박선생 왈 “아,이건 종명이가 가야 해, 빨리 갔다 오라우” 하셨다.홍선생은 내려갔으나 쉽게 돌아오질 못했다. “종명이 빨리 오라우~”하고 소릴 질러봐도 빨리 못 올라왔다. 약간 가파른 언덕이었다. 잠시 후 박고석 선생이 끌어주며 올라왔다. 홍선생은 등산을 못 했다. 박선생은 “야, 종명이는 내일 미아리고개부터 다시 다니라, 다리 훈련 멀었다 알았디! 다리 힘이 없으니까는 그런 거야.” 새 신발 샀다고 자랑하다가 잔소리만 들었다. 박선생이 늘 아끼는 후배가 바로 홍선생이고, 이번 쇼는 다리 건강 좀 챙기라는 자극이었다.
홍종명(1922-2004) 선생은 신앙 깊으신 화가였다. 그림이냐 교회냐 둘 중 하나 선택하라면 고민에 빠지실 것이다. 서예가 김기승 선생 등 몇몇이 1966년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전쟁 때 월남한 화가들은 고생을 많이 했다. 홍선생도 직업 없이 힘들 때, 안암동에 있는 D중학교에 나가게되었는데, 그 사연을 C교수가 내게 들려줬다. “얌전한데 직업이 없어서 그림도 제대로 못 그리는 걸 보다 못해 내가 잘 아는 일본 교장에게 취직을 부탁했지. 학교 교장은 나의 말을 믿고 미술강사로 홍종명을 썼다가 나중에 교사로 취직시켜준 것이지” 그 뒤 일본 교장은 떠났고, 홍선생은 D중고교에 계속 근무하시다가 S여 사대로 옮기셨다. 홍선생은 신앙적 내용 그림을 그려서 잘 알려졌고, 결국은 1974년 기독교 재단인 S여대로 스카우트되었다.그 후 정년 때까지 교수로 재직하였고, 학장까지 하셨다. 그의 학장 시절 학교에 분쟁이 있었다. 노조 직원들과 운영자 간 대립이 심해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민주노총 간부가 대학노조를방문하면서 더욱 격렬한 대립으로 치달을 때, 노조 측이 불법을 자행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 당시 홍학장은 인감도장과 직인 등을 가방에 넣고 출퇴근했다. 아마도 직인이나 인감을 몸으로 지키려는 배짱인듯했다. 한편으론 성격이 고와서 노조 농성 요구에 대처 방법을 찾는덴 애를 먹기도 했었다.
필자와 같은 대학에서 늘 지내셨고, 국제기독교아티스트 서울전 때도 애를 쓴 분이다. 인격이나 신앙은 우등생이었으나 식초는 우수 장학생급이다. 1980년 중구청 민방공 훈련 때 대학 전 직원이 새벽 5시 비상 출근해서, 훈련이 끝난 6시 인근 해장국집에 갔다. 아침 식사 중 홍선생은 주인장을 부르더니, 식초를 달라고 했다. 갖고 온 식초를 해장국 밥에 들어부었다. 모두 이상해서 시선을 집중해 물어보니 “난 고깃국이나 고기를 먹을 땐 반드시 식초를 발라야 먹어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 “이북에서부터 버릇이라서….” 어느 여름날 학교 앞 냉면집에서 교수들과 식사를 할 때도 아예 식초를 냉면에 쏟아부었다. 냉면 국물이냐 식초 물이냐가구분 안 될 정도로 신맛을 즐기셨다. 교수들과 회식자리엔 늘 식초병을 준비하는 모습이 그분의 식사 풍경이며 일상이었다. 평소 짜장면에도 식초는 마찬가지. 그래서 농담으로 별명이 홍식초 짜장이었다. 그 홍식초 짜장을 먹어보니 시큼한 짜장맛도 괜찮다는 중론이다.
홍종명 선생의 그림 바탕이 늘 황토색으로 깔리는데, 그 소문중 O씨의 말인즉 “어려웠던 시절 뜯어놓은 장판지를 길에서 주워 다가 그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빚보증을 잘못 서 어려움 겪던 세월이 몸에 밴 거라는 증언이었다. 그 후 나는 홍교수님에게 직접 확인했더니 “허허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황토 빛깔을 워낙좋아해서요”라고 과거 피난생활을 겪으며 긍정도 부정도 없이 지난 세월의 아픔을 포용하시는 듯이 조용히 얼버무리셨다.
정년퇴임 후 작업에 열중하셨다. 그런 어느 날 작업실에 강도가 침입해 물질적, 신체적 아픔을 겪으셨다. 그 고통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쁘셨고, 끝내 82세에 조용히 천국으로 떠나셔 주변을 슬프게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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