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21)임영방, 칼같은 성격이지만 따뜻한 눈물도 있는 분

김정

 
김정, 임영방 드로잉 ㅣ  한양대 토론장에서 좌) 임영방, 우) 김정


온양에 몇명이 동행해 갔을때, 우 임영방, 가운데 김정


임영방(1929-2015) 선생을 전시회와 학회를 통해 자주뵀다. 성미가 깔끔하셔 멀리서 인사 정도만 했었다. 필자는 이구열 선생 저서를 특히 좋아해 읽다 보니 이구열 선생과 친한 임영방 선생도 자연스레 가깝게 됐다. 임영방 선생의 주량은 적지만 술자리는 좋아하신 편이다.


1989년 세검정 터널 앞 근처 술집이 생기면서 카페촌이 성업하던 시절이다. 어느 날 이구열 선생이 여러 지인들과 그 동네 식당에서 대포 한잔하는데 대화 중 임 선생 얘기가 나오자 “아 참, 그 양반 요즘 못 만났지, 궁금한데 전화라도 한번 해봐야겠다”며 이구열 선생이 임영방 선생 집에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하곤 끊었다. 그러고 다시 이런저런 술 마시며 있었는데, 갑자기 임 선생이 식당에 나타났다. 모두 깜짝 놀라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하며 의아해했다.

왜냐하면 임 선생 집은 서울도 아닌 경기도 과천이었기 때문이다. 과천 시내도 아니다. 과천 뒤쪽 논둑길을 돌아서 한적한 외딴 집이었다. 그곳에서 어떻게 세검정까지 날아오듯 오셨는가다. 도대체 상상을 초월한 능력이다. 꼬마들 공상만화 마징가Z보다 더놀라웠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본인은 “아, 술이나 한잔 따라줘~”하며 말을 막으셨다.

그게 바로 임 선생의 성격이다. 칼 같은 개성이 넘친다. 외모는 조그맣고 얌전해 보이지만, 속은 불같은 성격이 깔린 분이다. 평소 이구열 선생을 좋아하다 보니 오랜만에 전화 받고 그냥 만사 제쳐놓고 달려왔다는 게 전부다. 요즘처럼 핸드폰 없던 시절이니 댁에서 집 전화 받은게 확인된 것이다.

1985-87 기간에 필자는 한국조형교육학회 학술대회 때 한양대, 숭의여대 등 공개토론장에서 임 선생과 토론 대담을 했다. 임선생은 ‘프랑스 초중고 및 대학의 미술교육 정책’ 발표를, 필자는 독일미술교육을 발표했다. 두 발표 후 프랑스-독일 비교설명하는 공개토론과 참가자들의 질문이 굉장히 길어졌다. 3시간 연속 질문이 쏟아졌고, 토론 답변 등 정신없이 진행됐다.

그때 느낀 건 임 선생은 시간을 칼처럼 정확히 지키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토론에 빠지다 보면 다양하게 넘치는 질문과 답변이 쏟아져 시간 엄수가 어려운데도 딱딱 요리하듯 맞춰 10분씩 조절하셨다. 그 조절능력은 거의 초인적 감각으로 질의응답 10개를 칼처럼 종료하셨다.

그 후 여러 번 만나 뵈는 사이에 정들면서 지인들 몇 명이 모여 같이 미술인촌을 꾸며 살자는 의견이 나왔다. 예컨대 조용한 시골에 모여사는 설계였다. 3-4명이 집단으로 이주해 각자 연구실 꾸며 사는 것이다. 그걸 실천에 옮겨보라는 임 선생 특명에 필자가 가끔 강원도와 충청도를 살펴봤다.

서울에서 한두시간이면 닿는 한옥마을 온양 근처도 봤다. 필자의 대학 제자가 그곳에서 살면서 한두 번 가본 적이 있었기에 그곳을 추천했었다. 그리곤 임 선생 등 3인이 현지답사를 갔다. 온양에서 남쪽으로 15분쯤 내려가면 아산 송악면 외암리가 나온다.바로 그곳이 후보지였다.

좋긴 참 좋았으나 동네 마을과 역전 오가는 버스가 뜸해서 안된다는 임 선생의 속전속결로 결국 포기했었다. 필자는 단념 고민을 며칠 했으나 임 선생은 단칼에 거절이셨다. 나중에 우연히 알았지만, 그 마을은 이종무 선생의 고향이라는걸 10여 년 뒤 늦게 들었던 에피소드다.

저돌적 단칼 모습을 보이시는 임영방 선생도 때로는 따듯한 온정도 보이셨다. 1986년 8월 23일 윤건철 선생 별세 때 아파트 빈소에 일찍 오신 임영방 선생. “저 젊은 친구는 본인이 건강하다고 자랑까지 했었는데…” 라며 눈시울 적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뵀다. 칼 같으신 성미도 슬픔 앞엔……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