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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유경채, 1㎜의 오차도 용납지 않는 화가

김정


김정, 유경채 드로잉


유경채(柳景埰, 1920-95) 선생을 1975년 예술원 주최 미술심포지움 행사장에서 뵈었다. 미술교육을 주제로 최덕휴 교수가 “1도는 1색 판화, 2도는 2색 판화다. 3도는 3색 판화로써…”라고 발표하는 도중에 질문자인 박철준 교수가 “다색과 흑백 구분이면 될걸 왜 복잡하게 1색, 2색, 3색이라고 합니까, 현장 학습에선 혼동이 올 수도 있습니다”라고 수정요구 발언을 했다. 그러자 최덕휴 교수가 흥분하며 “내 발표를 끝까지 듣고 말하세요”라고 했지만 박철준 교수는 “틀린 건 바로 고치쇼!”라고 큰소리로 맞대응했다. 서로가 “뭐가 어떻다고?” “왜 반말이야! 넌 선후배도 모르느냐” “하려면 똑똑히 해라”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막말이 튀어 나왔다. 이때 의장인 유경채 선생이 나서며 “두 분 이리 와요”하며 밖으로 끌고 가 내쫓곤 문을 꽝 하며 닫아버렸다. 밖에서 계속 고함이 나길래 경비를 불러 두 분을 강제 귀가시켰다. 유경채 선생의 퇴장 조치로 막말 격론은 즉시 종료됐다. 

그전에는 유경채 선생이 청소년미술심사장에서 다른 심사원과 의견 차이로 심사 거부, 귀가하신 것도 목격했었다. 필자는 유 선생이 무섭고 조심스러워 늘 멀리서 뵈며 지냈다. 

어느 날 유 선생 부인 K 여사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김 교수, 내가 당신 부인한테 한번 만나자고 몇 번 전했는데 왜 그래요?” “네, 죄송합니다. 사모님 그게….” K 여사는 우리 집 사람과 E 여대 선후배로 E대 문인화활동을 30여 년하며 친하게 지내오신 희곡작가셨다. 필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유경채 선생을 피해온 게 들통났었다.

1988년 아시아국제미술전람회 초대전 때도 뒤로 숨었다. 그러나 1989년 7월 아세아국제미전 땐 유 선생 지시로, 홍콩 대표 방한을 맞이하러 김포공항에 필자와 이대원 선생이 마중을 나갔다. 그날 비행기가 2시간 연착, 공항에서 기다리던 이 선생은 유 선생에게 연착 상황을 알렸다. 유 선생 전화를 받는 이 선생의 표정이 굳어졌다. 계획에 차질이 생겨 유 선생과 전화로 옥신각신하셨다. 통화 후 이 선생은 “휴~ 틀림없는 분이라서. 비행기 연착이 난들 어떻게해.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허허허”하며 넘어갔었다.

1989년 1월 15일 겨울, 필자와 L 씨, O 씨 일행은 신촌역 앞 길에서 우연히 유 선생을 뵈었다. “아니 어쩐 일로 우리 동네까지 오다니” 하시며 우리를 인근 중국집에 데리고 가서 짬뽕으로 식사하는데, 유 선생은 평소처럼 중국 술 죽주(竹酒)를 속전속결 드시곤 말없이 먼저 계산을 하신 후 가셨다. 거의 완벽주의 젠틀맨 기질이셨다.
1989년 10월 4일 서울프레스센터 칠순잔치에선 굉장한 것을 말씀하실 것처럼 목을 가다듬고는 “내가 70이란 걸 비밀로 해주시길”이라고 싱거운 농담을 하며, 듣고 있던 좌중을 “으하하” 웃기시기도 했다.




1990년 1월 1일 필자는 모처럼 부부 동반으로 신촌 유 선생 내외 자택으로 세배 인사를 갔다. 차를 마시던 유 선생은 옛날 얘기로 “내가 1955년도 이대 강사 시절 돈이 없어 여름 바지를 겨울에도 입어야 했지. 지금 대신동 집은 1958년 중학 1.2.3, 고 1.2의 5종 미술 교과서를 제작하기로 하고 K사 사장님이 우선 지어준 것이야”라며 목메어 말하셨다. “집만 덩그러니 있으면 뭘 해, 힘들게 살면서 그림도….” 과거 어렵게 지내온 고생담을 차분히 얘기하시던 유 선생은 결국 눈물을 슬쩍 닦으셨다. 그 날 필자는 귀갓길에 ‘늘 쌀쌀하고 차가운 유경채 선생도 뜨거운 감정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눈물을 보이시는구나’라고 생각했고, 그 이후론 유 선생님도 온정 깊은 따뜻한 분으로 기억하게 됐다. 

1990년 7월 11일 현대백화점미술관 ‘김정아리랑’ 개인전 오픈에 오신 유 선생은 즉석의 격려사를 통해 “김정은 산, 소나무, 음악으로 자신을 다스리는 작가요. 미술의 인문학적 연구를 많이 했지요. 아리랑도 그 중의 한 테마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날은 축사도 길게 하셨고 주위 분들이 권하는 술도 드시곤 늦게 가셨다. 

1991년 1월 2일 아세아국제전은 유 선생이 주도·창립한 행사였다. 행사 후 H 씨 등 4인이 인사차 유 선생 댁으로 갔다. 그 자리에서 연장자인 H 씨가 “새해에 한 말씀 드릴게요. 선생님 새해에도 건강하시려면 정말 화 좀 내지 마십시오. 제발 부탁입니다.” 직언하자 유 선생은 계속 유구무언. 술 한 잔 드신 후에도 또 여전히 묵묵부답이셨다. 4년 뒤 1995년 유구무언으로 선생은 조용히 먼 길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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