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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도숙, 공동체가 버린 화가 80년 만의 귀환

최열

오랜 세월 지역 미술사에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광주전남 미술사가 내게 특별한 까닭은 내가 자라나면서 미술가의 꿈을 키운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의재 허백련이나 오지호와 같은 거장은 물론 그 이름조차 통사에 올리지 못한 채 잊혀간 숱한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이가 있을 거라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내가 모르는 이름이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2015년 11월 어느 날, 너무 낡은 <노안도> 10폭 병풍을 해체하던 표구점에 마침 내가 들어섰는데 배접한 신문지 사이에서 전남 영광국민학교 학생들의 일본 제국 황군(皇軍)을 찬양하는 크레파스 그림들이 보였다.
나는 <황군 전쟁화> 때문에 병풍을 구입했다. 일제강점기 미술사상 처음 출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 뒤 저 <노안도>에 찍힌 인장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故고재식(칸옥션 대표)에게 질문했다. 그는 ‘可石(가석)’과 ‘武靈居人(무령거인)’이란 글씨를 읽어주면서 ‘무령(武靈)’은 전라도 영광(靈光)의 옛 이름이라 했으니까 영광에 머무는 가석이란 사람이라고 답변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 광주전남 미술사에 가석이란 아호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한 적이 없는 이였으므로 일본사람이 아니었을까 의심도 해 보았다.


 
김도숙, <매화>, <묵죽>,《 사군자 8폭 병풍》 중, 1939년 이후, 종이, 각 89.3×34.2cm, 최열 소장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났다. 저 가석(可石)이란 인물의 <사군자 8폭 병풍>을 구할 수 있었다. 뜻밖이었다. 게다가 그 가석은 김도숙(金道淑, 1872-1943)의 아호였으며 김도숙은 1907년 호남 최대의 의병장 심남일(沈南一, 1871-1910)과 함께 고향 나주에서 의병부대를 조직하고서 도통장(都統將)에 취임, 눈부신 활약을 전개한 의병이었던 것이다. 김도숙은 1909년 10월 심남일과 더불어 체포당해 7년의 옥고를 치른 뒤 1916년 석방되었고 향리에서 3.1민족해방운동에 나섰다가 전남 일대를 유랑하던 중 순천에서 생애를 마쳤다. 바로 그 유랑지의 한 곳이 영광이었고 이곳에서 그린 작품이 바로 <사군자 8폭 병풍>이었던 것이다.

그의 <묵죽>은 적의 심장을 향해 쏟아내는 총탄과도 같고 <매화>는 의병에서 물러나 처사(處士)의 생애를 살아가는 이의 아득한 마음과도 같다. 하늘을 향해 내지르는 함성이 마치 터지는 폭죽과도 같은 그 <묵죽>이며 한없이 부드럽고 평온한 <매화>는 식민지가 되어버린 공동체의 운명을 견디는 은일지사의 생애 그대로인데 이토록 멋진 기운이 넘치는 작품과 그 세계를 토해낸 화가를 사후 80년이 넘도록 존재조차 모른 채 살아왔으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미술사학을 한다는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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