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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정대기, 지사의 품에서 부는 칼바람과 폭포의 기운

최열

1909년 독립운동가인 남정(南汀) 박광(朴洸, 1882-1970)은 안희제(安熙濟, 1885-1943)를 비롯한 인물 80여 명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였다. 그 뒤 박광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1918년 안동현에서 곡물 무역상 신동상회를 설립하고 이를 거점 삼아 안희제의 백산상회와 연계하여 국내 독립운동가 은닉 및 자금 제공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19년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 1898-1958)의 의열단(義烈團)에 가담해 투쟁했다.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에서 태어난 벽산(碧山) 정대기(鄭大基, 1886-1953)는 1910년 8월 일제 식민지로 전락하자 상해로 망명하여 박광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정대기 개인의 활동상은 알려진 것이 없지만 박광, 안희제, 김원봉의 활약과 일치할 것이며 그의 귀국도 그 활동과 관련되어 있었을 것이다. 국내 잠입 이후 의병 및 상해임시정부 활동가였던 일주(一洲) 김진우(金振宇, 1883-1950)와 교유하면서 일본 및 대만을 전전하였다고 하는데 김진우가 1927년 중국, 대만을 거쳐 필리핀을 다녀왔음을 생각하면 두 사람의 행적 또한 일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좌) 정대기, <묵죽 8폭 병풍> 중 검기풍죽(劍氣風竹), 연대미상, 종이, 94.5×31, 최열 소장
우) 정대기, <묵죽 8폭 병풍> 중 폭포수죽(瀑布垂竹), 연대미상, 종이, 94.5×31, 최열 소장


정대기는 1928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우죽(雨竹)>, 1931년 제11회 서화협회전에 <우죽>으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였고 1934년에는 일본 태동서도원전에도 입선함으로써 미술계에 진입하였다. 정대기만이 아니라 김진우나 김일과 같은 의병 및 독립운동 출신자들은 귀국 또는 출옥한 이후 대체로 미술계를 무대 삼아 활동하는 가운데 음지에서 과거 조직과 연계하곤 하였는데 정대기의 경우 1931년 조선연무관(朝鮮演武館) 후원회원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무도인(武道人) 세계와 어떤 연관을 짓고 있었던 듯 하다.

해방 직전 정대기는 당시 경남문예의 중심이자 눈부신 땅 진주로 낙향하여 숱한 화가, 서예가와 어울렸고 해방 뒤 1949년 제1회 국전 추천작가로 추대되었으나 출품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끝 무렵 세상을 떠났고 1980년 문총 진주지부는 비봉산 자락에 묵죽비를 세워 그의 올곧은 생애와 아름다운 예술을 추모하였다.

하지만 김화수가 「사군자화의 그 맥」에서 “진주에 살았기에 전국적으로 큰 명성을 얻지 못했다”고 했던 것처럼 정대기는 미술계에서 잊혀져갔고 미술사에서도 배제 당했다. 그러나 정대기는 창검오가의 한 분으로 그의 <묵죽>이 보여주고 있는바 정교하고 세련된 기교와 창칼의 칼바람과 번개처럼 내리치는 폭포수의 강렬한 기운을 머금은 그 예술이야말로 식민지 시대 미술사상 가장 탁월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 이토록 뛰어난 예술세계를 지닌 작가를 배척하고 있는 대한민국 미술계와 미술사학계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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