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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송태회, 산림처사의 단아유연, 활달무애한 그 예술

최열

좌) 송태회, 오동, 종이, 129.3×31.5, 최열 소장
우) 송태회, 팔군자 8폭 병풍 중 포도, 모란, 소나무, 종이, 129.3×31.5, 최열 소장


20세기가 다 가버릴 무렵에야 몇몇 이들이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 1872-1940)란 이름을 언급했었고 21세기에 접어든 2010년에 비로소 화가 박종석이 『세한을 기약하고-염재 송태회의 삶과 예술』이란 두툼한 단행본을 간행했다. 물론 미술사학계에서는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미 ‘민족’이라든지 ‘독립’이라든지 하는 따위 낱말은 이른바 ‘진보’세력에 의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보수’와 같은 개념으로 비난당하고 있었던 시절이었고 저 ‘민족’이나 ‘독립’이란 개념을 토대로 삼는 항일지사의 예술 따위는 거의 휴지 취급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88년 17살의 송태회는 황현(黃玹, 1855-1910)과 함께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깊이 교유하였고 또한 청나라에 수차례 다녀왔다. 그는 1909년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입사했다가 국망의 기운이 급격히 밀려오자 낙향했다. 산림처사(山林處士)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화순, 보성, 능주를 무대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고 경술국치를 맞이해 황현이 자결하자 그의 문집 편찬사업에 동참했다. 순천에서 교육운동을 펼치고 있던 그는 1919년 3.1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자 전북 고창 오산학당(吾山學堂)으로 옮겼는데 이때 이응노(李應魯, 1904-89)를 제자로 거두었다. 국망 이전엔 시대의 부름에 응하여 사회활동을 펼치다가 국망과 더불어 산림에서 청년의 미래를 위한 처사의 생애를 살아갔던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예술가의 길을 지속해 오던 송태회는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자 1회부터 10회까지 서예와 사군자로 모두 8차례의 입선을 거듭하다가 1932년 서예와 사군자부를 폐지하고 동양화부로 편입시키자 이때부터 출품하지 않았다. 이 또한 낙향한 산림처사의 태도와 일치하는 선택이었다.

송태회는 사군자와 더불어 산수, 화훼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는데 그 가운데 <팔군자 8폭 병풍>은 짙음과 옅음, 강렬함과 유연함의 조화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단아유연(端雅柔然)과 활달무애(豁達無碍)가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예술세계를 보면 격변하는 국망 시대의 산림처사로서 교육운동에 투신했던 산림처사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예술세계는 미술사에서 거의 무시당하고 있다. 하지만 말이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시대의 가치가 바뀌면서 산림처사 송태회의 예술은 눈 밝은 이들의 눈빛으로 아주 환하게 밝혀질 것이고 언젠가 눈부신 보석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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