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9)독립군 김진만, 가장 짙고 억센 창검오가의 별

최열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 1876-1933)에게 추서하였다. 그 공훈 내용은 1915년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가입한 뒤 군자금 마련을 위해 권총으로 무장하고 아우 김진우를 비롯한 조직원 5명과 함께 1916년 8월 대구의 부호 서우순 집에 잠입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하고서 체포당해 징역 10년을 언도 받은 뒤 8년 동안 옥고를 치른 끝에 1924년 11월 출옥했다.

대구 맥향화랑은 건국훈장독립장 추서를 기념하여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80년 3월 ‘긍석 김진만 유작전’을 개최하고 그 화집 『긍석 김진만 서화집』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김진만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기는커녕 학위논문이나 일반 연구논문 또는 그 흔한 비평조차 나오지 않았다. 물론 시장에서도 그의 작품은 거의 거래되지 않았다. 다만 최근 대구의 독립운동정신계승사업회에서 대구 독립운동유적 90곳을 발표하면서 대구 중구 덕산동 668-17번지 김진만 형제, 부자 집터를 선정했다. 지금은 지번이 멸실 당해 다만 반월당 네거리 일대라고 볼 뿐이다.


  
김진만, <사군자 8폭병> 중 묵매 2폭, 종이, 140.8×34, 최열 소장


49살의 나이에 출옥한 김진만은 일제의 감시 아래 서화활동으로 생애 말기 10년을 보내던 중 58살이던 1933년 11월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파란으로 가득 찬 세월을 그렇게 마감한 것이다. 그렇게 세상을 떠난 뒤 8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김진만이란 이름은 그늘에 가려진 이름이다. 어린 시절 의병을 후원한 문인 허훈(許薰, 1836-1907)과 독립운동가 곽종석(郭鍾錫, 1846-1919) 문하에서 성장하였고 이후 중국 대륙을 주유하면서 제국의 망명객 민영익(閔泳翊, 1860-1914), 의병장 허위(許蔿, 1855-1908)와 교유한 김진만은 조국이 일제에 강점당하자 달성친목회,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에 가담, 활약을 전개하였다. 그가 가담한 조직은 모두 경북지역 최대의 항일투쟁 조직이었다. 그 시절 그는 빛나는 별이었던 것이다.

대개 그러하듯 지사 출신 화가들의 작품은 개성이 매우 강렬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그들의 강렬한 내면의 의지로부터 비롯하는 것인데 김진만의 경우 또한 예외가 아니다. <사군자 8폭 병풍> 다섯 번째 작품 묵매는 세상에 없는 매화 그림이다. 수직의 길고 긴 장대처럼 선 매화나무는 매화 그림의 법식으로부터 한참 벗어난 것이다. 첫 번째 작품 묵매는 세 번 꺾어줌으로써 법식을 따른 것처럼 하였으나 그 줄기는 여전히 직선을 씀으로써 법식으로부터 이탈이라는 점은 한결같다. 이는 스승 민영익의 운미준법(芸楣皴法)에 기원을 두는 것으로 그것을 매화에 적용함에 오직 자신만의 묵매를 창안한 것이다.

가장 짙고 억센 독립운동가의 기운 넘치는 김진만의 회화세계는 그러므로 ‘창검오가’의 대열에서도 단연 빛난다. 문득 다섯 번째 작품 묵매의 화제시가 가슴을 친다. 기억만이 아니라 늘 감사해야 할 우리가 그런 그를 잊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다.

“지난해 꽃 아래서 홀로 기대섰으나[去年花下曾孤倚]
  오늘 만나 보니 고인이로다[今日相逢是故人]”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