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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도봉서원에서 권력의 덧없음을 생각한다

최열

층층이 높은 옛 탑은 공중에 서 있고                     古塔有層空自立
글자 없는 동강난 비석은 풀속에 반쯤 묻혔네        斷碑無字半靑堆
늙어서 사람의 일 모두 버리고                              殘年盡棄人間事
고승과 친구삼아 이곳에서 지낼거나                     結社高僧擬不回

- 서거정, 『사가집(四佳集)』

이방운, 도봉, 종이, 46.5×71.9㎝, 개인소장

이방운(李昉運, 1761-1822 이후)이 그린<도봉(道峰)>은 지금껏 전해오는 그림 가운데 도봉서원(道峰書院)의 원형을 가장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방운과 같은 시대를 살다 간 김석신(金碩臣, 1758-1816 이후)의 <도봉도>는 도봉산 일대의 모든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도봉서원의 모습을 변형시켰지만 이방운의 <도봉>은 화폭의 대부분을 서원의 풍경에 할애하고 있다 보니 6채의 전각과 그 전각의 형태는 물론 위치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조감도처럼 보인다.

지금의 도봉서원은 1871년 서원철폐 때 철거당했다가 꼭 일백 년만인 1971년에 재건한 건물이다. 도봉서원은 역사상 두 번 사라졌다. 한 번은 임진왜란 때 일본 군대가 방화를 함으로써 사라졌고 또 한 번은 서원의 온갖 특권의 소굴로 전락함에 따라 1871년 서원철폐를 단행할 때 철거당했다.

이이(李珥, 1536-84)가 쓴 <도봉서원기(道峰書院記)>에는 그 건물의 배치를 설명하고 있는데 선비의 기풍(氣風)을 일변시킨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위판(位版)을 모신 사우(祠宇)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고 사우 양쪽에 보조 건물로 학생의 기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또 남쪽에 위치한 서원에는 중앙에 강당을 세웠으며 강당 양쪽에 협실(夾室)을 붙여 날개처럼 만들었고 맨 앞쪽에 자리한 행랑채는 시냇가에 있으며 행랑채 옆에 정문을 설치하였는데 이는 지형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이방운이 <도봉>에 묘사한 서원의 모습은 건물의 위치와 구조가 아주 상세하여 도봉서원을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고자 한다면 이방운의 <도봉>이야말로 설계도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봉유원지가 있는 것을 보아도 이곳 일대는 경관이 아름다워 명승지로 이름난 곳이었다. 그런 까닭에 이곳엔 여러 절집이 들어서곤 했으며 실제로 도봉서원 터는 본시 절터였다는 것이다. 이런 땅에 조광조를 기리는 서원이 들어선 까닭은 바로 그 조광조가 소년 시절부터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자주 드나들었으며 청년 시절에는 동료 및 제자들과 함께 이곳으로와 학문을 토론하였고 조정에 출사한 관료 시절에도 휴가 때면 이곳에서 노닐었기 때문이라 한다. 추진했던 개혁이 너무 강렬해서 기득권 세력의 저항도 그만큼 컸고 끝내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아 겨우 38살에 삶을 마친 일세의 인걸인 조광조를 추숭하여 마지 않던 일대의 주민들이 양주 관청에 청원하여 비로소 서원이 들어설 수 있었다.

도봉산은 예로부터 한양의 금강산이라고들 불렀는데 빈말이 아니다. 하늘 향해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와도 같아 보이는 바위 봉우리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지만 문사동계곡, 원도봉계곡, 무수골, 오봉계곡의 그 깊고 깊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아득함을 준다. 힘겨울 적이면, 그 계곡의 한 줄기를 타고 설날 어머님을 모시고 가족끼리 회룡사(回龍寺)에 올랐다. 함흥에서 머물던 태조 이성계가 1398년 한양으로 돌아오던 길에 이곳 계곡에 땅굴을 파 몸을 숨기고 있던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찾아와 며칠을 머물렀다고 해서 회룡사라 했다고 한다. 지금 청와대 늪지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용인지 이무기인지 모를 이에게 권하고 싶다. 지도자가 어찌해야 하는지 이곳 회룡사 또는 저 도봉서원에 들러 생각하고 또 생각하시기를.

이번 설날, 도봉서원을 떠올리며 개혁정치를 꿈꾸던 조광조의 풍운과도 같던 생애에 이르고 보니 그저 모든 게 덧없어 보였다. 그렇다. 그렇게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데도 저들 권력을 탐하는 자들은 왜 미래는 자기 것이라 믿고 저렇게 설치는 것일까. 도봉서원이 들어서기 훨씬 전 폐허가 된 옛 절터에 왔던 최고의 문인 서거정(徐居正, 1420-89)이 노래한 덧없음이 그렇게도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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