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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영웅과 슬픔 흐르는 행주나루

최열

푸른 갈대 모래톱에 고기잡이 배 매어두니   靑蘆洲上繫漁舟

강물 서쪽 흘러가는 보리 익는 계절이라     一水西流二麥秋

스쳐 가는 바람 따라 구름이 비 뿌리니      雲逐過風吹作雨

강가 오두막서 이 한밤 갈매기와 짝하네     江廬一夜契沙鷗


- 남효온, <행주초정(幸州草亭)>, 『추강집(秋江集)』



서울에서 자유로를 타고 고양(高陽)으로 가다보면 방화대교 북쪽 끝에 행주산성(幸州山城)이 나타난다. 그렇게 지나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잠시 발길 옮겨보면 뜻밖에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 행주대첩(幸州大捷)의 영웅 권율(權慄, 1537-1599) 장군 동상으로 시작해 사당이며 정자에 기념관과 기념탑을 두루 갖추었는데 정상에 우뚝 선 기념 비까지 그만 역사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양을 점령당한 상태였던 1593년 2월 권율 장군은 군사를 이끌고 이곳 덕양산(德陽山)에 진을 베풀었다. 이곳은 수도 방위의 전략 요충지로서 돌 성벽이 없더라도 공격과 방어가 완벽한 천연 요새였다. 위협을 깨우친 일본 3만대군이 파도처럼 권율의 행주진으로 쳐들어왔다. 권율의 병력은 겨우 2,300명일뿐이었다. 2월 12일 새벽의 일이다. 일본군은 3개로 나누어 번갈아 하루종일 아홉 차례나 공격을 해댔다. 그 때마다 절묘한 방법으로 방어에 성공했거니 무엇보다도 여성들이 치마폭에 돌을 주워 나르는 ‘행주치마’에 또한 슬기롭게도 ‘재주머니 던지기’라는 비상한 전법은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신화 그대로다. 완전한 승리였다. 패배한 일본군의 시체가 너무도 많아 태우는 냄새가 십리 밖까지 퍼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기세를 잃어버린 일본은 얼마 뒤 한양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3대 전투로 평가받은 이 승전의 통쾌함도 어느덧 아득한 역사가 된 1741년. 일백 오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 덕양산 행주산성은 사대부의 별장지대로 바뀌었다. 연구자 최완수의 지적에 따르면 화폭 왼쪽 끝자락 절벽 위가 김동필(金東弼, 1678-1737)의 낙건정(樂健亭), 가운데가 송인명(宋寅明, 1689-1746)의 장밀헌(藏密軒), 오른쪽 끝이 김광욱(金光煜, 1580-1656)의 귀래정(歸來亭)이란다. 모두 집권 노론당의 명문세가(名門勢家)로 전승지가 어느덧 귀족의 유원지로 변해버렸던 게다. 게다가 이곳 강변은 웅어(위어, 葦魚)와 황복어(하돈, 河豚)가 잡히는 곳으로 유명해 귀족의 입맛을 만족케 하였다는데 마침 화가 정선은 그 고기잡이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였다. 고기잡이 배가 양쪽으로 나란히 포진한 모습이 마치 전투를 위한 군대의 진법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전쟁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전쟁과 평화가 번갈아 가며 땅에 끼치는 영향이 그토록 큰 것인 모양이다. 


그로부터 일백년이 지난 1841년 헌종이 서삼릉(西三陵)에 왔다가 권율의 공적을 기리는 건물 한 채 없음을 보고 애석하여 조인영(趙寅永, 1782-1850)으로 하여금 행주기공사(幸州紀功祠)를 창건하게 하고 또 1845년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비석이 너무도 낡아 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대첩비(大捷碑)를 건립하게 하였다. 아름다운 일이다. 유원지의 부끄러움을 씻어냈으니 말이다. 또 일백년이 흐른 1950년 6월 28일 서울을 조선공화국 군대에게 내준 대한민국 육군 제1사단은 이곳 행주산성으로 집결해 한강을 도하해 후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포(金浦)를 점령한 조선공화국 군대로 말미암아 포기해야 했고 그 뒤 9월 한미 해병대가 서울수복을 위해 상륙한 곳이 바로 이곳 행주산성이다. 1963년에 15미터짜리 기념비를 다시 세웠는데 두 해 전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장군이 쓴 글씨를 새겨넣었다. 일본군대를 물리친 행주대첩 비문을 일본군대 출신 군인이 새긴 이 희안한 사건은 어이없지만 그저 그렇게 권력과 역사가 뒤엉키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정선이 양천현(陽川縣)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는 사실 행주대첩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그저 생업과 유희의 표현일 뿐이다. 그래서 행주(幸州)라 하지 않고 행호(杏湖)라고 써넣었고 또 절친한 벗이자 시인인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은 이 그림을 보고 ‘늦봄이니 복어국이요, 초여름이니 웅어회라, 복사꽃 가득 떠내려오면 그물을 행호 밖에서 잃겠구나’라고 읊조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계절의 진미요, 별미를 생각하며 군침 흘렸던 그림일뿐이었던 게다. 어쩌면 이곳 행주에서 태어나 문득 농사를 지었던 생육신(生六臣) 남효온(南孝溫, 1454-1492)도 그윽한 때를 만나면 그런 정서에 빠졌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같다. 스스로 이 행호를 추강(秋江)이라 하고 그 이름을 취해 아호로 삼았으니 부도덕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 아픔을 베풀어 놓았던 것이다. 정변을 일으켜 조카를 내쫒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世祖)를 능멸함에 망설임 없던 남효온은 죽어 묻힌 뒤 1504년에도 또 죽는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이곳 행주산성을 지나칠 때면 정선의 별미 그림이나 권율의 영웅담만이 아니라 남효온의 슬픈 노래를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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