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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의 휴머니즘 아카이브 인생(7): 미술계를 향한 출사표, 「관람객은 속고 있다」

심현섭

미술계를 향한 출사표, 관람객은 속고 있다


김달진이 수집 뿐 아니라 자료 정리에도 심혈을 기울인 것은 학문적인, 구체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다. 글쓰기는 어린 시절부터 김달진의 취미이자 마음속에 품은 이상 중 하나로 수집활동과 함께 줄곧 그의 삶의 중심에 있었다.

 

           충남 중학교에서 서너 정거장 정도 버스타고 가면 우체국이 있었어요. 우표 같은 거 기념우표는 한정 판매잖아요. 선착순으로 가서 빨리 사려고 했었죠. 그러면서 중 고등학교 땐 문학이라고 할까 그런 거에 약간 관심도 있고 써보고 싶고 그랬어요. 지금 교지에 보면 그 당시 충남 중학교 교지 이름이 신형이예요. 1학년 때 보면 <레미제라블>이라고 독후감 그게 실려 있고. 2학년 때는 기행문이죠, 경주로 수학여행 갔던 그 이야기가 교지에 실려 있고. 3학년 때는 <친구>라고 해가지고 약간 창작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가 써서 꾸미는 그런 거. 친구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까 그런 거가 산문으로 실렸어요. 지금 보니까 그때는 수세식이라는 말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친구>라는 글을 얼마 전에 읽어보니까 수세식이 뭔가 몰라서 수세식에 대해 질문하고 그랬었더라고요. 그때는 문학 소년이라고 해야 하나? 글 쓰는데 관심이 있지 않았나싶어요.

 

자그마한 체구에 수줍음 많던 문학소년, 김달진은 기회가 닿는 대로 글을 썼다. 국현에 근무하기 전, 월간 전시계에 있을 때인 1978년부터 그는 스스로 미술자료전문가라는 타이틀을 붙여 월간 전시에 많은 글을 발표했다.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하면서도 내심 미술평론에 대한 꿈을 가지고 언론매체에 글을 응모하기도 했으나 당선되지 않았다. 그는 방향을 선회해 글을 쓰되 자신의 장기인 자료정리와 그 결과 나오는 통계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팩트를 제공하는 그의 글은 특히 신문기자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제공하는 팩트는 기사의 원재료로서 매우 유용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까 얘기했던 자료를 정리해서 데이터로 발표를 하면서 통계를 내고, 미술계의 현상, 어떤 문제점, 이런 것들을, 글을 많이 썼어요. 그때부터 미술계에서 아~ 저 사람이 저렇게 자료를 열심히 수집해 가니까 우리나라 공모전의 통계가 나오고 미술잡지의 역사가 나오고 그러는구나. 그런 글을 굉장히 많이 썼는데 그런 것들이 또 이상하게 기자들의 기사거리로 굉장히 좋았어요. 팩트가. 인용보도하기가. 그래서 제가 썼던 글들이 무수하게 많이 막 그 언론에 기사화가 엄청나게 많이 됐어요. 그러면서 이제 그 자료라는 것이 저렇게 유용하다. , 포트폴리오가 하도 많아가지고 예를 들어서 이건 제 일종의 뭐 포트폴리오거든요 1979년도.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책장의 스크랩북 들을 보여주었다. 거기엔 오래된 신문, 잡지에 게재된 자신의 글이 정성스레 오려져있었다. 그 같은 스크랩북이 작은 사무실 한 쪽에 쌓여있었는데, 그대로 한 편의 한국미술사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그는 그 중 하나를 읽어주었다.

 

           뿌리 깊은 나무 793, “예술은 화장품 같은 것이어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는 말. 문제는 오늘날의 우리 미술이 소수 위한 고급 화장품 같은 것이 되어 간다는 생각하는 사람이 점차로 늘어나고 있다는 데 있으며 예술의 진솔한 참 뜻은 소수를 위한 예술 독점을 지양하고 서민은 누구나 다 예술을 즐길 수 있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끝을 맺고 싶다.” 미술평론가 김윤수 씨가 봄을 기다리며에 썼던 글을 읽고 제가 인용한 거죠.

 

793월에 나온 월간 <전시계>에 게재한 미술품의 경매 첫 시도 : 1회 한국근대미술품 경매전이었다. 이 글을 읽어주는 그의 목소리와 얼굴 표정에서는 미술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수집인생을 관통해온 휴머니즘 아카이브와 일맥상통하는 철학으로, 소수의 독점물이 아닌 서민 모두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는 일관된 의지의 표출이었다.

 

<월간 전시계>에 있을 당시 김달진의 나이가 스무 살 초반이었음을 감안하면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월간 전시계>에서 달마라는 필명으로 실질적인 편집장 역할을 하였던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와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달진은 한국 미술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글을 발표한다. 1985, 당시 <선미술>의 주간이었던 유홍준의 권유에 의해 겨울호에 실린 관람객은 속고 있다라는 글은 미술계에 만연해있던 잘못된 전시통계, 작가 이력, 연표, 전시회 명칭 등을 낱낱이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글이었다. 끝맺음으로 적은 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가 오늘날 자료 수집계의 잠언으로 남은 이 글은 수많은 언론매체에 인용되면서 한국 미술계에 자료수집과 정확한 기록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달진 개인적으로도 지금까지 음지에서 끈질기게 이어왔던 수집활동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글이 나오게 된 배경과 반응을 구술을 통해 살펴본다.

 

           김: 옛날에야 이 공모전이 대단했잖아요. 지금에야 이 공모전이 아무 의미가 없지만. 옛날에 선전, 국전이 있고, 나중에 동아미술제, 중앙미술대전이 나오면서 국전에 대항하는 어떤 민전시대가 도래를 했다고 보고 그래서 공모전시대에 대한 이런 얘기를 썼죠. 이런 것 중에 작가의 그림을 지상으로 소개하는 걸 지상전시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옛날에 사상계 62년부터 몇 년간 국전 선외선해가지고 국전에 실제 뽑히지 않은 거를 또 다른 이름 있는 화가들이 계속 연재를 해가지고 나온 것을 계속 목록화한 거지요. 석도륜 선생 같은 경우는 서예가이면서 미술 평론했던 우리나라 초창기에 미술평론가의 한사람이죠. 이 사람이 여성동아에 나의 대표작이라고 해가지고 이런 식으로 쭉 연재한 것에 대한 목록화 작업을 하고.


: 그럼 저기 보이는 스크랩북이 선생님의 글들을 다 모아놓은 거 네요. 이런 

식의 글들을? ~ 양도 상당히 많네요? 이 자료들만 다 정리를 해도 역사가 나오

겠는데요?


           김: 그래서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이라는 책을 1995년도에 한 권 냈었죠.


           심: , 그러셨군요.


: 이건 뭐 <월간 전시계>의 편집후기고, 나중에는 편집장 역할을 한 거죠. 김달진이라는 이름이 들어있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는 80년도 들어서면서 편집장까지 한 셈이죠. 편집후기를 제가 썼으니까. 계속 이런 편집후기를 쓰고, 그러다 이제 전두환 대통령이 언론 통페합 하면서 폐간되었죠198010대 한국 미술협회 이사장 선출 참가하면서 그 당시 그 박서보 사단이라고 얘기했었던 박서보와 조각가 김영중 선생이 교육회관에서 선거를 치렀을 때 치열했던 이런 것을 취재 가서 기사로 썼죠. 그 후도 지금 얘기 했던 대로 팸플릿을 잘 만들자. 전시되지도 않은 작품 도판에 실어놓으면 되느냐 이런 거에 대한 문제점 지적이라든지이런 거 같은 경우는 우리나라 서화협회 처음 발기인이 13인인데 그 중 한사람이 나수현이냐 현채냐는 문제를 계간미술 독자살롱에서 일종의 이의제기를 하기도 했었고. 얘기했던 대로 열화당에 이런 자료를 연감6권 나올 때 다 제공한 거고. <관람객이 속고 있다>를 썼을 때 이제 그것이 발표되니까 한국경제신문, 서울신문, 부산일보 뭐 일간스포츠 이런 거에 김달진이가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술계에 센세이션이 일어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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