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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달진의 도전과 결실 1) 자료수집: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2)

심현섭

200112, 가나아트센터의 자료실에서 시작한 <김달진미술연구소>200510월 평창동 개인주택 3층으로 이전한다. 평창동에 집을 산 지인이 공간을 제공한 것이다. 반지하를 포함한 2층짜리 집이었다. 이 시기 김영나 관장과 김현숙이 방문하여 격려하는데 해온 일도 많지만 하실 일도 많다는 인사말은 김달진의 뇌리에 깊이 새겨져 이후 지금까지 자신의 일을 추동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2007년 평창동 집 주인은 2층에 보관한 자료들의 무게로 집에 균열이 갈 것을 염려하여 나가주기를 요구한다


20072<김달진미술연구소>는 경복궁역 부근에 위치한 통의동 국민대학 총동문회관 지하로 옮겨 통의동 시대를 연다. 198(60여 평)의 공간에 웅지를 튼 연구소는 처음으로 자료를 월, , 금요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제한적으로나마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한다. 20083월 서울시에 2종 박물관으로 <김달진미술박물관> 등록을 한다. 법적 충족의 어려움 뿐 아니라 과연 지금까지 모은 미술관련 자료만으로 박물관이 가능할 것인가라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작지만 개성 있는 박물관을 만들자는 계획을 밀어붙인다. 여기에는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 명예회장의 조언이 큰 힘이 되었다. 협소한 공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구소를 길 건너 건물로 옮기고 전시장과 자료실을 마련하여 실사를 마친 후 200810,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을 개관한다


김달진의 박물관 개관은 미술계와 언론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여느 박물관과 달리 한 인간의 열정과 역경이 고스란히 담아있는 시간의 축적물로서 개관 자체가 한국 미술박물관 역사의 한 장을 장식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개관에 맞춰 발간한 아름다운시작-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2008)에는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을 비롯한 18명의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축하 글이 실려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상 보다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일관되게 미술자료를 수집해온 한 인간에 대한 진심어린 경의와 위로와 격려의 글에서 미술계에서 김달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위치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박물관협회명예회장 김종규는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모범적인 과정을 거쳐 설립된 박물관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최근의 박물관은 설립속도가 과거 그것에 비해 매우 빨라진 느낌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질 향상과 문화의식 상승에서 오는 자연스런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겠으나 그것과 더불어 박물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그 주된 원인이 아닌가 한다. ... 그러나 그 만큼 그것의 설립과정이나 소장유물에 비례하여 진지함이나 사명감 같은 것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박물관 법에서 말하고 있는 수집, 관리, 보존, 조사, 연구, 전시, 교육이라고 하는 박물관의 고유역할 수행보다는 경영과 마케팅 부분에 치중한다는 전문가들의 우려도 들려온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다. 우선 설립자인 김달진 관장을 이미 청년기부터 잠재적으로 박물관을 준비해온 사람이다. 꾸준히 자료를 모은 그는 먼저 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리고 연구소에서는 수립된 자류를 관리, 보존, 조사, 연구해 왔다. 그리고 그러한 자료를 연구자들에게 자연스럽게 공개함으로써 연구와 교육도 지원해왔다. 이번 박물관 설립은 거기에 소위 전시라고 하는 숟가락 하나만을 더 놓는 격이다. 매우 모범적인 과정을 겪어왔다는 얘기다. 인위적인 형식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에서 잉태된 박물관인 것이다. 4)

 

전 한국근대미술사학회장 윤범모는 김달진이 이룬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설립을 축하하며 이렇게 감탄한다. “정말 우공이 산을 옮긴 것이다. 평생 외길에서 힘을 모으더니 산천도 감동을 했나보다. , 얼마나 멋진 일인가.” 5)

 

그러나 건물 지하의 상황은 36년 동안 김달진이 수집한 18t에 이르는 자료를 보존하기에는 너무나 열악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을 양동이로 받아야 했고 습도가 높은 지하실은 두 대의 제습기를 종일 돌려도 자료를 보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술계의 경사로 받아들여지던 <김달진박물관>의 이러한 모습은 한국 문화계의 민낯이기도 했다. 겉으로는 경제적 성장을 이루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문화의 기초자료를 모으고 보존하는 일에는 아직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손길이 닿지 않은 상태였고, 개인의 취미에 근거한 수집 활동으로 이루어놓은 것마저 지켜낼 만한 문화적 함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적인 예로 국립현대미술관의 2007년 예산 237억 원 중 자료 구입비는 2600만원으로 전체 예산의 0.14%에 불과했다. 자료와 보존의 중요성에 대한 국립미술관의 형편이 이러할진대 다른 곳이야 명약관화하지 않는가.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당사자격인 미술계나 언론계가 자성의 시각을 가지고 이 사안에 접근했다는 점은 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의 점진적 성숙을 지시한다. 언론은 물이 새는 박물관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취재했다. 중앙일보의 문화스포츠 에디터 노재현은 김달진의 수고를 이제 우리 사회가 함께 감당할 때라면서 관심을 촉구한다.

 

          안타까운 것은 좁은 공간만이 아니다. 마침 내린 비 탓에 서고의 두 곳과 학예실, 복도 등 다섯 군데 천장에서 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날은 행사 때문에 잠시 꺼 두었지만 평소에는 굉음을 내는 제습기 두 대를 하루 종일 가동한다. 아침에 출근한 직원은 제습기에 가득 찬 물을 버리고 다시 스위치를 켜는 게 첫 일과다. 지상에 번듯한 전시공간을 확보하지 못한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돈 때문이다.

          한 개인이 생활고를 무릅쓰고 36년간 한 우물을 판 것도 대단하지 않은가. 기록문화에 취약한 우리 풍토에서 김씨는 홀로 가시밭길을 헤쳐왔다. 따지고 보면 국가나 공공기관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한 셈이다. 그렇다면 소장 자료를 제대로 보존, 전시할 수 있게끔 넓고 안전한 공간을 마련하는 일 정도는 우리 사회가 맡을 때가 됐다.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다. 6)

 

MBC 9시 뉴스데스크도 김달진 박물관의 형편을 전한다.

 

          오랜 꿈인 박물관을 연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이왕가 미술관요람’, ‘1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등 희귀본들이 즐비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없는 자료도 많이 갖고 있어 전문가들도 그에게 문의할 정도이지만,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 아직도 상당량을 시골집 창고에 쌓아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습기가 많아 고생이 많고요. 여름에 비가 많이 오면 (바닥에) 플라스틱 통을 놓고 ... 내가 좋아 내가 시작한 일, 그만 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너무나 버거운 짐이 됐다 느낀 적도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저에게는 천직이 되고, 사명감이 되고 내가 이 일을 꼭 해야 된다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7)

 

김달진으로서는 무척이나 안타깝고 막막한 형편에 처한 상황이지만, 이를 계기로 언론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미술자료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면 불행 중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꼭 일반인 뿐 아니라 아직 미술자료 수집가 김달진을 모르고 있던 미술계 사람들에게도 수집가 김달진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으며, 이후 미술계에서 김달진의 활동과 인식의 폭이 확장되는 계기였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그의 믿음의 고백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이 이룬 선()의 압권은 그동안 창작작품에 비해 보존과 관리에 소홀하였던 미술계에서 미술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한 미술인들이 앞장서 창립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후원회>이다. 후원회 발족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오광수 평론가(현 갤러리 산 관장),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 서성록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 표미선 한국화랑협회장, 박서보, 이두식, 이숙자, 최종태 작가 등 미술계의 명망가 60여명을 발기인으로 해 2009210, 덕수궁 미술관 시청각실에서 후원회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 후원회장으로 선임된 박래경(현 한국큐레이터협회 명예회장)은 현재까지 회장직을 유지하고 봉사하고 있다. 박래경은 미술사 연구의 기본이 되는 자료정리와 분석이 미흡한 한국 미술계의 실태를 바로잡는데 김달진 미술관의 역할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래된 종이나 쪽지가 집에 있으면 지저분하다고 못 참죠. 남편이 화가라도 주부가 미술관련 인쇄자료들을 쓰레기라고만 인식해 마구 버리는 식입니다. 다시 구할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이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미술사 연구의 기본이 자료정리와 분석인데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작가나 작품연대가 잘못 기록되고 학위 논문에까지 버젓이 실리는 악순환이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죠. 8)

 

사립미술관으로서 이처럼 광범위한 지원을 받은 후원회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당시 인사동 미술계 사람들은 이렇게 명망 있는 미술인들이 후원하니 김달진은 이제 걱정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이것은 김달진이 보여 온 집념과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기쁜 일이지만, 장기적인 차원에서 후원회가 김달진이라는 개인과 맺어진 관계에 의존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출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지금의 시점에서야 인식할 수 있는 우려일 뿐 당시로서는 한마음으로 자료보존에 대한 필요성에 적극 공감하여 함께 힘을 모은 미술계의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후원회는 20178월 현재 박래경 회장과 윤진섭 부회장 등 고문과 감사 등의 조직을 이루고 미술자료의 보존을 위한 공간 확보를 위해 애쓰고 있다.

 

팽팽한 긴장가운데 역사 위를 줄달음친 김달진이 이를 인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그의 아카이브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졌던 수집과 보존 활동이 공공영역으로 넘어가는 지점이었으며, 수집 자료들이 대내외적으로 사유재에서 공공재로 좀 더 명확하게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박물관 경영의 측면에서도 더 투명하고 공정한 경영을 요구하는데 이러한 부분에 대한 냉철한 평가는 김달진 박물관이 지속가능한 조직으로 존립할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4)김종규, 김달진! 그 무던한 사람이 만들어낸 박물관이기에..., 아름다운 시작-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5-6

5)윤범모, 아름다운 시작-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32

6)노재현, 꼼꼼한 달진씨, 중앙일보, 2008.10.24. 

7)MBC 9시 뉴스데스크, 2008. 10.28. 

8) “미술자료, 체계적 수집·관리 더 늦추면 후대에 대한 죄악”,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9.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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