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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민의 붉은 색에 대하여

심현섭

노경민의 붉은 색에 대하여 

   <나는 노경민 작가에 대한 글을 3부로 계획하고 있다. 이글은 노경민의 작업을 개괄한 글로서 1부이다. 2부는 「노경민의 붉은 색을 위하여」로 노경민 작업을 붉은 색의 생성 과정, 붉은 색을 중심으로 순차적으로 분석하려한다. 3부는 작가 노경민에 대한 글을 예상하는데 「붉은 색의 노경민에 대하여」 정도의 제목을 생각한다.>

노경민의 작품은 욕망의 성장사를 담는다. 2009년 여자의 성적 희열의 표정과 농밀한 포즈를 담기 시작한 그의 작업은 2010년, 2011년 <시>연작에 이르러 그 희열의 표정을 캔버스 가득 클로즈업한다. 길거리에서 주운 성산업 전단지를 그렸다지만 섬세하고 다양하게 나열된 이미지들은 작가 자신의 욕망의 재현임을 스스로 말하고 있다. 이는 타자의 시선을 상정하고 그에 비친 대상을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선으로 응시한 자기 욕망을 그렸음을 보여준다. 또 도색 잡지에 나올 법한 정돈된 표정, 옅은 수묵의 경계가 주는 비현실성으로 인해 실제라기보다 환상의 가능성을 더 내포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화면 가득한 여자의 얼굴은 몽환에 가까워 차라리 순수한 느낌을 준다. 3여년의 과정에서 캔버스의 크기를 축소하는 대신 몸뚱이를 생략하고 얼굴의 환희만 남긴 구도는 작가의 관심이 육체적 욕망보다는 성에 대한 어떤 판타지에 더 기울어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이는 그가 성행위를 거부하거나 경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계의 왜곡으로 깨질 수 있는 육체적 희열에 대한 기대를 의식적으로 보류하고 타자와 상관없이, 설령 관계를 맺더라도 자신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욕망의 환상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다고 예상된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노경민의 욕망의 대상이 타자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의 욕망은 나르시시즘에 가깝지 않았을까. 

2012년 그의 포트폴리오에 들어간 단 하나의 작품은 <미친 년>으로 사뭇 자학적이다. 2013년, 그는 다시 <시>를 잇는다. 그가 보류했던 관계 속의 희열이 결국 기대를 저버렸던 것일까. 환상은 허물어지고 내면의 욕망은 거칠어진다. 화면에는 처음으로 타자인 남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작가가 견지했던 욕망의 내적 메커니즘이 흔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내면의 욕망의 환상이라는 성취의 대상이 일시에 허물어진 듯 폭력적이기까지 한 그의 그림은 적나라한 표현 뒤에 뭔가를 은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은폐의 내용을 추적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다만 가학적이기도 하고 자학적이기도 한 이미지들은 지금껏 믿어왔던 어떤 신념의 체계에 혼란이 일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희열이나 환희와 같은 느낌보다는 포기, 방기의 상태에서 성에 탐닉하는(미쳐있는) 외설적 느낌을 주는 자포자기적 표현에서 뒤에 그의 그림을 대표하는 붉은 색이 얼핏 나온다는 점이, 2009년 <무제>에서도 바탕에 붉은 색이 나타나지만, 그나마 <늪>과 같은 이 시기를 위로한다. 

내면의 욕망과 관계 속 욕망이 허상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 해체된 이후 노경민의 욕망은 객관화한다. 육체적 희열과 내면의 환상이 꼭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의 욕망의 객관화는 그리는 대상의 변화에서 감지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페미니즘적 시각을 전제로 보고 싶지 않다. 작가 내면의 욕망이 해체된 결과 남녀사이의 주·객이 허물어진 정도로 이해한다. 여자만을 대상으로 하던 그의 그림에 남자가 등장하고, 이후 남녀구별이 쉽지 않은 형체의 인물로, 2019년 <물속에서>전에 이르러서는 사람들보다 사람을 둘러싼 창, 천정, 간판, 커튼, 거울 같은 사물이 주 대상으로 등장한다. 두 사람이 나오지만 하나는 커튼 뒤에 가려져 있고 또 하나는 남자의 엉덩이다. 그러나 정작 눈길을 끄는 건 길게 늘어뜨린 커튼의 출렁거림과 엉덩이에 올린 복숭아로 작가가 의도적으로 응시의 대상을 사람에서 사물로 옮기고 있는 느낌이다. 욕망, 특히 성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얽혀야 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가 허상이었음을 알게 된 이후 그의 관심이 사람보다는 주변의 사물로 바뀌는 가운데 욕망이 분산되고 주·객의 희석화가 이루어지는 변화의 과정이다. 이는 노경민의 내면에 남녀사이의 대상화가 해체되고 타자를 향한 시비와 원망이 희석된 상태가 일시적으로 안착했음을 의미한다.  

욕망의 대상이 허상임을 깨닫고 자신의 욕망을 객관화하는 과정은 그의 성장사일 터인데 그 과정에서 그가 발견한 붉은 색은 묘한 매력을 풍긴다. 내면의 욕망에서 사물로 옮겨온 대상의 변화가 그를 사각의 캔버스에 더욱 집중하게 했을까. 화면을 채운 붉은 색은 관람자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완성된 이미지로 다가온다. 그 이미지는 진지한 대화 대신 가벼운 농담이나 재치 있는 입담으로 관람자가 정작 갈망하는 감상의 기쁨, 성찰을 방해하는 식의 무례함을 저지르지 않는다. 작가는 스스로의 내면을 정직하게 표출하여 내놓는다. 그 앞에 서는 순간 관람자는 전체로서 덩어리로 다가오는 완성된 평면의 회화를 우선 볼 뿐, 또 그가 지금 시점에서 완성한 진술을 발견할 뿐 관람자로서 작가와 더불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 내거나 새로운 무엇을 창출할 것을 요구받지 않는다. 회화가 형식과 재료에 치우친 나머지 어느새 잃어버린 서사를 간직한 노경민의 색은 작가의 재능과 주도적 역할이 살아있는 회화를 드러낸다. 


복도, Corridor, 장지에 수묵채색, 58×86cm, 2017.

욕망과 폭력, 쾌락, 트라우마가 교차하고 조우하는 그의 그림은 정신분석적 해석, 상징과 은폐의 내용을 분석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붉은 색의 현전은 이를 무색하게 한다. 내가 노경민의 작품을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된 지점은 여기이다. 현대 미술은 관객의 역할과 공유를 목표로 이를 유도하는 참여, 관계, 공간배치와 같은 수많은 방법을 착안, 시도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창의성, 고독한 성찰과 사유와 같은 작가의 고유한 임무 보다는 인위적 해석과 억지스러운 소통으로 관람자의 묵상과 사유를 방해하는 미술이 횡행한다. 이런 와중에 드물게도 노경민의 붉은 색은 그 평면의 아우라로 전시장을 주도하며 보이는 것만으로 보는 이의 감상을 지배한다.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서양화와 같은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을 자제하기도 하고 과정자체가 그것을 제어한다. 먹을 갈고 종이에 밑 작업을 하고 색을 만드는 행위에서 대상을 보고 느낀 처음 감정은 어느 정도 가감하거나 농담한다. 오늘날에 이르러 이런 과정이 다소 생략된다 해도 수행으로 여기는 동양화의 제작과정은 여전히 감정의 표현을 절제하고 간접적인 것으로 만든다. 동양화의 이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노경민의 붉은 색이 관람자에게 강렬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처음부터 붉은 색에 대한 분명한 자기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선택은 의미의 전달의지이다. 붉은 색은 작가가 감상자에게 전달할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기호이다. 그 의미를 전달하는 붉은 색을 만들기 위해 노경민은 적어도 3-4번의 붓질을 반복한다. 이후에 먹선으로 형태를 매기는 등의 작업을 이어간다. 이렇듯 노경민의 색은 분명한 자기선택인데다,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작가의 첫 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형성되어 감상자에게 수용의 파장을 일으킨다. 

색은 선에 비해 추상적이다. 선은 어떤 식으로든 경계를 지으며 형태를 갖추지만 색은, 특히 노경민의 그림에서처럼 배경전체에 깔린 색은 사각의 캔버스를 경계로 하여 현실과 구분될 뿐 아무런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 노경민의 그림에 나타난 대상들이 붉은 색으로 빨리듯 수렴되는 이유는 바로 이 커다란 추상성 때문이다. 붉은 색으로 채워진 노경민의 작업에서 그 대상은 의미의 일부만을 소화한다. 나머지 대부분의 욕망, 환상과 같은 작가의 모든 사유와 인식의 대상은 붉은 색이나 그로 인해 경계가 희미해진 선과 형태의 뭉개짐으로 흡수된다. 붉은 색은 성적 욕망의 생성과 해체, 재생성의 변증법적 순환의 시간을 축적하고 있다. 시간의 축적은 노경민이 붉은 색으로 물든 종이를 솔 같은 것으로 문대 거칠게 일어난 균열로 기호화하는데 이 거친 균열은 아직 미숙한 물질성 속에서도 시간 속 경험의 상처가 만만치 않음을 암시한다. 붉은 색은 순결의 상실, 욕망의 해방과 파괴, 고독과 상처를 지시하는 바 이는 내면의 흐름과 연동한다. 따라서 노경민의 그림에서 관람자가 의미를 읽어내는 데는 그림 외 다른 정보는 필요 없으며, 그림을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일 정도만으로 붉은 색의 서사를 읽을 수 있다. 색은 언어와 글로 구체화할 수 없는 무한함이 있다. 색이 어휘로 표현될 때 세밀한 의미들은 휘발한다. 관람자는 작가가 펼쳐놓은 색 앞에서 순간의 현전을 경험하는 것으로 족하다. 노경민의 작업이 관람자의 관심을 획득하는 힘은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노경민 회화의 미덕이다. 

노경민의 그림에서 형식에 치우쳐 이야기를 잃어버린 회화의 본질을 복구할 가능성을 보는 일은 흥미롭다. 특히 색이라는 전통적인 표현 방식으로 이야기를 구조한다는 점, 동양화로서 이점인 회화의 평면성을 고수하는 점은 그 가능성을 높인다. 개념 이전에 본능으로 성의 욕망에 접근한 노경민이 발견한 붉은 색은 작가의 성장과 시간이 축적된 결과물로서 사건의 구체성, 물질성, 사회성 등 이야기의 구조를 획득하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유동적이어서 완성을 향해가는 과정의 지금에 적용될 뿐 미래에는 또 어떻게 변할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현 상황에서 노경민의 작업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노력보다 작업 자체에 쏟는 물리적 노동이 더 중요한 시점에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기억과 경험으로 역사 속에 실존하는 작가의 집중적인 노동은 미리 조율한 어떤 이야기보다 더 풍성한 이야기를 만든다. 노동의 지속적인 행위에 집중할 때 기억의 오류, 변질된 소통, 허구의 서사 등은 사라지고 진실한 것은 남을 것이다. 노경민이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여 성적 욕망의 객관적인 대상화 혹은 사물화에 일정 정도 다가갔듯 자신의 시간과 존재로 발견한 붉은 색의 평면에 땀과 노동을 더하여 더욱 순간의 몰입을 제공한다면 오늘날 몰입에 메마른 감상자로선 축복이다.(201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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