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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에서 2019년으로: 김동욱의 ≪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와 ≪서울, 심야산보II≫

심현섭

1995년에서 2019년으로: 
김동욱의 ≪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와 ≪서울, 심야산보II≫


≪서울, 심야산보II≫ 전시장 전경, 서울, 스페이스22, 2019. 

김동욱의 <심야산보>에 대한 호기심은 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 때문이었다. 사회 소수자들을 다룬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과 비슷한 전시제목은 우리 사회의 약자 혹은 소외된 자의 이야기를 심야산보를 통해 일괄하는 사회적 현실을 드러내는 리얼리즘을 떠올리기도 했다. 한낱 밝음이 어찌 어둠의 깊이를 알겠는가라는 니체의 수사가 아니더라도 어둠에는 다 드러내지 않는 감춤의 미학이 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어둠은 감춤으로 인간의 상상을 유발한다. 어둠을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현상의 이면을 가리킨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삶의 뒷면에 새겨진 감추고 싶은 치부들은 대개 어둠 속으로 침전한다. 이래저래 어둠은 밝음보다 더 많은 걸 내포하고 있는 탓에 적어도 예술의 모티프로서는 밝음에 비해 한 수 위다. 그 어둠속에서 산보를 한다?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산보라지만 하필 ‘심야’에 그러니까 적막, 외로움, 이면의 기운이 떠오르는 한 밤중에 작가는 무엇을 보고자 산보했을까. 

≪서울, 심야산보II≫(2019.7.17-8.9, 스페이스22)의 사진들은 한 밤중, 사람들이 사라진 거리에 남은 건물들의 초상이다. 이 건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낡았다는 점이다. 김동욱의 건물은 오랜 세월 구체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기록이며, 사람들에게 축적된 삶을 기억하게 하는 매개이다. 보이지 않은 것의 물질화를 업으로 하는 예술작업이 ‘기억’에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프루스트와 벤야민 이래 예술작업의 모티브로 절대적이 된 기억 때문이기도 하겠다. 노형석에 의하면 김동욱의 건물초상은 삶의 흔적을 포착하여 사람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건물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실은 건물에 거하면서 희로애락의 역사를 축적한 사람들이 김동욱의 렌즈가 주목한 감춰진 대상이다.  

건축의 풍경 속에 그 어둠과 거리의 단면 속에 날카로운 작가의 역사, 기억에 대한 생각이 올올이 스며있다는 것을 포착하게 된다. 그건 김동욱 작가의 사진에서 발견하는 기억하는 방식, 혹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시선이 자아내는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
그리고 작가의 말처럼 ‘신축 빌딩 사이에 남루하게 섰던 오래된 건물’은 환영 속 배우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도시와 사람들이 지난 세월 어떻게 들어오고 나가고 바뀌었는가를. 

<종로5가 332-3>(2019)에서 두 개의 철문은 굳게 닫혀있다. 천막간판과 한 쪽 벽에는 가로등이 내뿜은 하얀 빛이 선명하다. 천막 아래 깊은 어둠은 비스듬히 기울어진 쭈글쭈글한 간판을 더 무겁게 아래로 끌어내린다. 오른 편에는 ‘당신의 모험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등산용품점 간판의 글자가 보인다. 갈래갈래 늘어진 전선이 어지럽다. 장소는 시장, 때는 심야이다. 굳게 닫힌 철문은 활짝 열려 시끄러웠을 한낮의 시장을 환기한다. 천막아래 깊은 어둠은 천막 위 밝은 불빛과 대비되어 더욱 암울하다. 등산용품 가게 간판에 쓰인 '모험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문구는 산과 시장을 동시에 암시하며 그 장소들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위험은 바위에 붙은 사람에게 매달린 등반용 레다(ladder)와 관리되지 않은 채 늘어진 전선으로 고조된다. 심야의 건물을 둘러싼 각 기호들은 하나의 이미지를 이루어 한낮의 태양아래 북적였을 사람들이 무한경쟁의 자본시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발언한다. 발언은 사진의 대상인 건물의 크기와 비례하여 더 복잡하고 다양해진다. 

김동욱의 사진은 이렇듯 하나의 건물을 중심으로 길거리, 가로수나 가로등,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빛, 가로지르는 전선 등을 매우 짜임새 있게 배치한 정교한 구도를 반복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반복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강화하는 것과는 달리 김동욱의 반복은 그것을 약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김동욱의 사진이 빛의 운용과 정교한 구도로 건물자체에 대한 관람자의 미적 감각을 충족시키는 만큼 거기 존재했을 감춰진 대상인 사람과 삶에 대한 응시는 좀체 허용하지 않는 역설에 있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서울, 심야산보II≫에서 건물에 얽힌 사람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작품 제목에 덧붙인 건물등록일, 공시지가, 소유권이전 등에서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노형석의 말대로 건물의 역사, 기억일지언정 그 안에서 부대꼈던 인간의 명멸을 표현한다고 하기에는 역시 부족하다. 적어도 나에게 ≪서울, 심야산보II≫는 인간 사회의 현실, 특히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리얼리즘적 묘사보다는 작가의 탐미적인 내적동기가 빛과 구도를 통하여 더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주의적인 작품으로 다가왔다. 

데스크에 놓인『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1995) 사진집이 눈에 띤다. 표지에는 검게 탄 농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고 척박한 농촌의 현실을 대변하는 자갈밭과 희미한 지평선과 거기에 걸린 섬 같은 검은 언덕이 있었다. 사진집에 실린 작가의 말에 의하면, 작가는 1994년 경 운주사를 다니는 동안 휴거소동, 세계무역기구(WTO)로 재편되는 세계 경제 질서와 동학 백주년이라는 서로 다른 일들을 접하며 사진으로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농민을 찍기 시작했다. ≪서울, 심야산보II≫를 보고 꽤 심미적이라고 느낀 나로서는 정치·경제적으로 소외받던 농민들을 정면으로 찍은 사진들은 조금 의외였다. 당시 한국은 전두환의 철권정치와 노태우로 마감하는 군사정권을 역사의 장으로 넘기고 김영삼 정부가 문민정치를 열고 있었다. 국내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확장하는 반면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 WTO, 우루과이라운드 체제가 들어서면서 농산물 수입 등의 문제가 농민의 삶을 전방위적으로 옥죄어 오던 시대였다. 

<전북 김제 1994.5.>. 다가올 여름 잡초의 성장을 막기 위한 흰 비닐이 가로로 길게 늘어선 밭에 네 명의 아낙이 있다. 삽을 굳게 잡고 당당한 포즈를 취하는 여자와 빙그레 웃으며 정면을 바라보는 여자를 포함한 네 명의 여자는 밭 너머에 봉곳이 솟은 봉분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사진집에 등장하는 농민들의 응시에는 부정과 긍정이 혼재한다. 전봇대를 따라 이어진 전선은 저기에서 여기로 혹은 여기에서 저기로 이어지는 역사를, 하얀 비닐 고랑은 가로로 반복적으로 이어져 세월의 축적을 지시한다. 그 너머에는 농민들이 삶을 일구는 마을이 있다. 사진의 시선이 모아놓은 대상의 결합은 질긴 생명과 덧없는 죽음의 대비를 드러낸다. 이 대비는 동학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전북 김제라는 장소 특정성으로 인하여 살아있는 자들의 동시대 농촌의 현실과 결연한 생명력과 반복적 순환을 상기한다. 사진집의 사진들은 민중적이며 서사적이며 정교한 카메라로 담아낸 농촌의 현실이다(육명심). 작가의 의도는 사진에서 인물을 뺀 모습을 상상했을 때 오는 대상들의 적절한 배치와 치밀한 구도에 잘 나타난다. ≪서울, 심야산보II≫에서 확인할 수 있는 김동욱의 구도는 일찍부터 빼어난 것이었다. 작가의 의도적 화면은 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혁명의 근원지 정읍의 농민들을 중첩하여 시간의 혼재 혹은 동일화를 생성함으로써 동시대 정치·경제적 어려움을 발언한다. 송기원의 말대로 김동욱의 ≪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는 역사로 이름 지어진 과거와 현재를 재구성한 리얼리즘을 제시한다. 

내가 보기에 김동욱의 1995년 ≪농민, 또 다른 백년을 기다리며≫과 2019년 ≪서울, 심야산보II≫ 사이에는 리얼리즘의 농담, 사람에서 사물로 전치한 대상, 의도의 변화가 있다고 여겨진다. 두 작품 사이의 <농민, 백두대간>시리즈나 그의 대표작으로 회자되는 <그림엽서>, <오래된 사진첩>, <강산무진>의 과정과 상호관계가 이의 변화를 가늠케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늠은 육명심의 서문 앞에서 지극히 부차적이다. 

사진이란 찍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라는 새로운 명제입니다. 앞으로 과연 이 사진들은 얼마만큼 철저하게 살아가는 생생한 삶을 통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 갈지 자못 궁금합니다. 이것은 사진을 찍기 이전의 사진가 자신의 문제임을 김군은 철저히 명심해 주길 바랍니다.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는 육명심의 명제는 표현과 실천, 말과 행위의 일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진의 곤란함을 암시한다. 어쩌면 사진의 어려움에 빗대 삶의 공허함을 고백했는지도 모른다. 표현과 실천의 일치는 방법에 따라 사람마다, 또 같은 사람이라도 시간과 상황에 따라 그 정의와 기준이 바뀔 수 있다. 따라서 표현과 행동의 일치여부에 대한 판단은 궁극적으로 자기 몫이다. 1995년과 2019년 사진 사이에 김동욱에게 어떤 변화가 있다고 한다면 그 또한 사진과 삶의 일치라는 명제 앞에서 오랜 시간 고뇌한 작가 자신의 소산일 것이다. 
<2019.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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