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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철학': 김순기의 PIANO PREPARE

심현섭

'보는 철학': 김순기의 PIANO PREPARE

PIANO PREPARE라는 제목이 나오기까지 귀에 스치는 소리가 바람같다. 제목이 나오는 검은 배경과 곧이은 두 화면의 빛, 색조의 대비, 감정을 몰아가는 소리는 이후 펼쳐질 영상이 철학과 사유의 어느 지점을 향해 가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한다. 

두 화면에 등장하는 사람은 달라보인다. 왼쪽 사람은 파란 옷을 입고 짧은 머리를 하고 있다. 오른쪽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작가 자신이다. 양쪽 다 대나무 잎을 배경으로 한다. 왼쪽 화면에는 눈이 내린다. 무겁지는 않지만 들뜨지도 않는다. 다른 쪽은 눈이 내리지 않는 대신 밝은 노란 빛이 강조되고 댓잎이 바람에 흔들린다. 두 개의 화면에 분리된 정과 동은 하나의 덩어리로 섞이어 색다른 감각을 불러오지만 어떤 용어로 딱히 말하기 어렵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조율한다. 갑자기 오른 쪽 화면의 피아노가 연기에 휩싸이며 이내 불길이 솟는다. 그 순간 왼쪽 여자는 바로 일어나 자리를 뜬다. 댓잎 사이로 피아노가 보이고 눈은 여전히 비처럼 내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리는 충돌음은 두 화면의 긴장을 더한다. 좌우의 장면은 조화, 균형, 의도 같은 것들과는 무관하다. 두 화면은 사유를 방해하지도 어떤 사유를 강요하지도 않으며, 흐르는 세월처럼 무심코 바라보게 하는 힘만으로 존재한다.  

오른 쪽 화면의 불길은 피아노를 태운다. 흰 연기가 계속 나더니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노란 불길이 솟구친다. 왼쪽 화면의 피아노 위에는 흰 눈이 쌓인다. 흰 눈을 맞는 피아노와 불길에 휩싸인 피아노가 원근을 반복하면서 한참동안 이어진다. 왼쪽 피아노가 확대되는 동안, 오른쪽 화면은 불길을 중심으로 멀어졌다 가까워졌다한다. 간간이 아쟁같은 소리가 동양적 명상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양쪽의 피아노가 클로즈업된다. 한쪽은 하염없이 눈을 맞고 다른 쪽 피아노는 노란 불길에 휩싸여 회색빛 재로 변해간다. 댓잎을 배경으로 눈을 맞는 피아노, 불길에 휩싸여 재로 변하는 피아노. 불, 눈, 댓잎, 피아노가 빚어내는 대비와 조화는 생과 사, 생성과 소멸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오른쪽 불타는 피아노가 원경으로 잡히면서 아까 오른쪽 피아노, 지금은 불타고 사라져가는 피아노를 조율하던 김순기는 다른 이가 조율한 왼쪽의 피아노에 다가간다. 준비와 실행, 계획과 결과가 엇갈리는 운명을 지시하는 이 장면에서 검은 옷에 노란 허리벨트를 맨 김순기의 발걸음은 사와 소멸의 운명에 저항하려는 듯 당당하다. 피아노에 다가간 김순기는 오른손으로 의자 위의 눈을 조심스럽게 쓸어낸다. 다른 쪽 피아노는 여전히 불길에 휩싸인다. 멀리 노을을 배경으로 불에 타는 피아노는 원경의 거리만큼 소멸에 접근한다. 필멸의 자연과 불멸의 의지가 조용히 흘러간다. 

의자 위의 눈을 쓸어낸 김순기는 피아노 뚜껑 위의 눈을 치운다. 손에 묻은 눈을 털어낸 김순기는 건반뚜껑을 연다. 그리고 돌연 돌아서서 손을 엉덩이에 닦으며 화면의 정면으로 걸어온다. 다른 이가 준비한 피아노에 다가선 김순기지만 정작 건반을 두드리는 연주는 또 다른 이의 몫인가 보다. 자타의 의도와 행위가 분절와 합일의 시공간에 섞여 순환한다. 

피아노를 뒤로 걸어나오는 발걸음 또한 당당하여 미련 같은 건 없어 보인다. 행여 남았대도 양손을 툴툴 터는 모습은 뒤에 남은 건 고려하지 않는 무심함이다. 하지만 동시에 보이는 오른쪽 화면의 멀리 노을과 함께 불길에 스러지는 피아노의 형상은 아쉬움이다. 시종을 구분할 수 없이 이어지는 음은 아쉬움과 무심함이 교차하거나 혼합하는 지점을 덧없이 하지만 생의 의지는 여전하다. 종영자막이 나오고 이로써 6분여의 사유는 끝난다.

생성과 소멸, 생명과 죽음, 운명과 의지, 정과 동, 행위와 의지의 공동체적 순환을 보여주는 김순기의 영상 <PIANO PREPARE>(1985)는 말과 글을 요구하지 않는 ‘보는 철학’이다.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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