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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이미지의 응시: 나르시시즘의 자아가 빚어낸 공간

심현섭

기하학적 이미지의 응시: 나르시시즘의 자아가 빚어낸 공간  
         _김원숙 초대전: 《지금/여기–2021》, 갤러리에, 2021.2.17.-3.1.
  
모든 이차원적인 평면에서 이루어지는 재현은 늘 뭔가를 숨기고 있다. 김원숙의 그림이 숨기고 있는 것은 공간이다. 여기서 숨기고 있다는 말은 공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라기보다는,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공간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기대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김원숙의 그림은 공간을 기대하게 한다. 거기에는 그의 공간이 빚어내는 인장력과 압축력의 팽팽한 균형이 있다. 우리의 인체 또한 인장과 압축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공간이기에 그가 자아낸 공간은 관람자에게 텅 빈 몸속을 부유하는 느낌을 준다. 부유는 운동성을 함의한다. 김원숙의 그림에 나타나는 계단이나 면들의 중첩 역시 방향성과 함께 부유하는 움직임을 지각하게 한다. 

김원숙의 그림에 담긴 공간에 대한 기대는 관객의 발길을 유도한다. 말 그대로 꾀어서 이끈다. 그러나 그림 앞에서 겪는 경험을 순차적으로 배열해보면 이러한 유도는 우선 시각에서 일어난다. 먼저 중세시대 원근법의 대표적인 표상이었던 타일을 연상하게 하는 그리드의 반복적인 층이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시선을 따라가다 만나는 그리드로 형성된 면과 면의 원근법적 중첩은 공간을 형성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발의 움직임을 인지한다. 이 지점에서 몸속을 부유하는 느낌은 좀 더 현실화한다. 공간은 눈과 발, 즉 신체의 움직임을 유도하고, 거꾸로 신체의 움직임이 또한 공간을 창조한다. 메를로-퐁티가 말한 바, “행위 하는 비전” 이 생성한 공간이다. 이것은 작품을 하나의 오브제로 보기보다는 공간 내의 요소들로 보고 신체의 경험과 연결성을 중시하였던 미니멀리즘을 연상하게 한다. 미니멀리스트의 작업이 물리적 공간/장소에서 이루어졌다면 김원숙의 그림은 2차원의 평면캔버스에서 신체적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차원의 경험을 느끼게 하는 것, 이 경우 3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을 2차원적 공간에서 느끼게 하는 것은 일종의 환영이다.  

김원숙의 환영은 일정 정도 선과 면, 그리고 그 반복으로 이루어지는 착시효과에 의지한다. 그의 그림은 그리드와 면의 반복과 간혹 뒤틀린 면을 사용하여 동적인 리듬을 준다. 원근법과 원근법의 불규칙적인 운용이 뒤섞인 화면은 심연의 미로를 떠올린다, 다시점이 형성한 무수한 공간은 끊길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짐을 반복하면서 화면에 공존한다. 빛은 비고정적이다. 음영에 의한 실루엣을 거부하고 선과 면만으로(최근에 색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형태를 연출한다. 이런 작가의 기술이 어우러져 김원숙의 화면은 환영의 공간을 구축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고정된 눈이다. 이것은 김원숙의 그림이 우리의 눈을 고정시킨다는 의미이다. 그의 그림이 우리를 사로잡아 마침내 매혹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불러 세워 자기 앞에 멈춰 서게 하는 데는 성공한다. 이는 회화의 욕망의 성취인 바, 그림이 관람자를 바라보는 ‘응시’의 생성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김원숙의 그림은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환영의 공간을 매개로 관람자를 ‘응시’로 이끄는 발화점을 제공한다. 

라캉에 의하면 응시는 대상을 바라보는 나를 보는 대상의 바라봄이며, 회화에는 항상 응시와 같은 것이 나타난다. 그런데 응시는 바라보는 주체인 나의 욕망의 반영이자, 대상을 허구화시키는 욕망의 동인이다. 일차적으로 이러한 응시는 작가와 대상 사이에 발생할 것이다. 즉 김원숙이 어떤 대상을 선과 면으로 분절하고 압축하여 공간을 형성하는 행위는 공간에 대한 어떤 욕망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응시가 주체를 바라보는 대상의 바라봄이라고 해도 그 발생은 신체 즉 작가의 눈에 있다. 작가의 눈은 신체의 움직임에 연계한 현상학적 눈으로서 관념과 신체가 “혼연한 자아요, 나르시시즘의 자아요, 느끼는 행위가 느껴진 것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아”이다.

이러한 사실은 김원숙의 공간이 자아의 표출임을 설명해준다. 사실 인간의 공간에 대한 욕망은 본능적이다. 태초에 하늘과 땅으로 공간이 분리된 이래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집을 짓고, 회화에서 사각의 캔버스라는 공간을 만드는 일련의 행위들은 인간의 공간본능을 드러낸다. 그렇게 볼 때 김원숙의 공간은 자아의 표출과 동시에 원초적인 인간본능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현실의 공간과 드러나지 않는 다른 차원의 공간”을 만나려는 욕망으로 “어린 시절 읽었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가 들어갔던” 다른 차원의 이상한 나라에 대한 환상이다. 그 환상의 욕망이 기하학적 이미지로 나타난 데에는 김원숙의 전공인 수학과 자연보다는 인공적인 것, 시골보다는 도시를 좋아하는 기질과 관련 있어 보인다. 즉, 김원숙의 눈이 생성한 응시가 나르시시즘의 자아를 대상에 내재화하여 공간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통상 기하학적 그림이 물성과 형태를 강조하는 반복된 패턴으로 작가의 자아를 제거한 느낌을 형성하는 데 반하여, 김원숙의 그림이 건축 조적의 구축적인 느낌과 또 물감의 흔적을 남겨놓는 등 물질성을 담아내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축이나 물성의 느낌보다는 작가의 공간 확장과 미지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의 욕망이 더 강하게 드러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일탈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그 기원은 뒤늦게 뛰어든 화가로서 김원숙이 공간 확장의 욕망을 드러내는 작업을 놀이로 받아들이는데 있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작업에 뭔가 거창한 의미와 이데올로기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엄숙주의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김원숙은 자신의 작업을 재미있는 놀이로 여기며 즐겁게 임한다. 그가 그림의 대상으로 선택하는 공간이 일상적인 장소인 것도, 라인테이프를 떼어내며 생기는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흔적을 신기해하는 것도, 나이프를 사용하여 만든 거친 질감을 휴머니즘의 생성으로 이해하는 것도, 최근 들어 자신의 작업에 공간의 변화를 위해 색을 이리저리 운용하는 것도 특별한 목적과 의미를 부여하려는 엄숙주의에서 벗어나있는 작가의 즐겁고 낙천적인 태도에 기인한다. 이러한 즐거움과 재미를 받아들이는 데 우리는 익숙하지 않다. 이런 태도를 쾌락이라는 용어로 수렴하여 쉽게 경박함과 연결시켜온 관습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기심 섞인 재미없이 작가의 긴 수명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한 개념과 의미의 과잉에 빠져있는 현대미술에서 작업을 놀이로 여기는 김원숙의 태도는 기존의 문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기하학적 이미지와 일상/재미의 미학을 만들어낼 수 있는 토대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김원숙, <지금/여기-2106>, Acrylic on canvas, 2021, 53cm x 45.5cm


김원숙, <지금/여기-1902>, Mixed media on canvas, 2019, 116.8cm x 91.0cm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원숙의 기하학적 형상은 모호하다. 정형과 비정형, 규칙과 불규칙, 이성과 감정, 차가움과 뜨거움, 유클리드기하학과 비유클리드기하학 사이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것 같은 모호함을 준다. 이런 모호함이 김원숙의 작업을 독특하게 만드는 잠재적 역량임에 분명하지만 뭔가 아쉬움이 여운으로 남는다. 아마도 그것은 기하학적 형상이나 작가의 흔적을 철저하게 밀어붙이지 않은 상태에서 이 둘을 적당히 혼합한 듯 보이는 키치의 감 때문일 것이다. 이런 느낌이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어서 경계나 틈과 같은 용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런 개념으로 범주화하기에는 그림의 양이 부족하다. 화가의 그림이 어떤 형상을 채택했을 때는 그에 상응하는 사유와 시간과 집중의 축적물이어야 한다. 김원숙의 기하학적 형상이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을 때 지금 그 답은 명쾌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감상은 또 얼마나 유효한 것인가. 이 감상은 결국 그림은 어떠해야 한다는, 마치 화가가 그림에 자신을 투사하듯 반영한 관람자의 욕망이지 않을까. 김원숙의 기하학적 그림의 모호한 느낌은 이런 응시 때문에 발생한, 그림을 통해 관람자 자신을 바라보는 자아의 분출인 셈이다. 이런 인식은 김원숙의 그림을 바라보는 개인의 감상이 인류학적일 수 있다는 점을 일깨운다. 즉 그림이라는 실체를 인정하기보다는 인간이 만들어온 역사의 관점에 그림을 끼워 넣으려는 인간중심적 관찰일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후에야 관람자는 비로소 ‘미끄러지는 응시’의 두 번째 고개를 넘어, 다시 김원숙의 ‘그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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