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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민: 도상(途上)의 ‘풍경’

심현섭

도상(途上)의 ‘풍경’
:《장재민 개인전: 부엉이 숲》 
(학고재, 2020.10.14 - 11.15)



장재민, <멈춰 서 있는 사람>, oil on canvas, 110 x 95cm, 2019.  

I.

장재민은 어떤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대상에 대한 나름의 상(像)을 의식에 새긴다. 그때 이미 그림을 그릴 것이라는 생각이 있겠지만 그가 캔버스 앞에서 형태를 잡아갈 때는 세 개의 이미지가 갈등한다. 사실로서 사진 이미지, 회상으로서 기억 이미지, 그리고 의식이 지향하는 이미지다. 장재민은 사진과 기억 이미지의 영향을 감소시키면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의 현재성 속에서 자신의 의식작용이 생성하는 이미지를 물감으로 그린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세계의 반영이나 복사가 아닌, 심리적 재현으로서 ‘풍경’이라고 불리는 세계를 창조한다. 그의 그림은 실재와 기억과 자기표현 사이의 갈등의 결과다. 장재민의 입장에서 갈등일 수도 창작의 기쁨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 두 감정이 상호 투사하는 갈등이다. 장재민의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대상의 본질 같은 관념적인 것이 아닌, 순수하게 눈에 보이는 형태에 대한 갈등을 가시화한다는 점이다. 장재민의 갈등은 예술의 본질적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눈에 보이는 세계를 자신의 의식 속에 집어넣으려고 시도하고 어떤 행위, 즉 쓰거나 그림으로써 실체화하기 때문이다. 

II.

장재민의 ‘풍경’은 작가 자신의 의식으로 재구성한 ‘그림’이다. 그는 “낭만적 감상의 대상으로서 풍경이 아닌 심리적 재현으로 재구성된 풍경화를 제시하여 현실을 받아들이는 인식의 과정”에 주목한다. 그리는 과정에서 장소에 대한 경험, 기억, 회상이 개입하겠지만 그가 그림을 그릴 때 가장 역점을 두는 부분은 물감을 사용하여 시각적·심미적 형태를 완성하는 일이다. 이는 작가가 의식한 대상에 대한 분위기나 느낌(aura)을 가장 잘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보이는 이면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거나 숨은 뜻을 찾는 탐구의 쾌감에 앞서, 우선적으로 보이는 혹은 보는 것으로 만족을 주는 그림이 된다. 

장재민의 그림이 시각적·심미적이라고 해도 전시장에 걸린 이후 그림이 전달하는 의미는 관객의 감상과 결합하여 재구성된다. 그것은 그림과 관객의 단독적인 만남에서 발생하는, 비의도적이고 무의식적인 몰입(그림의 입장에서는 흡수)이거나 개인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떤 깨달음일 수 있다. 이는 그림을 위한 작가의 “자발적 고립”에 대응하는 관객의 고립 상태가 가져오는 어떤 깨달음의 개연성, 즉 그림이라는 기표의 다의성을 가리킨다. 이 논의는 작가의 존재이유가 관객의 정서적·감상적 효과의 유도 혹은 산출에 있는지, 아니면 형태 그 자체의 형성에 있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함의한다. 이 질문에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에서 내가 짧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장재민 그림의 출발점이 어떤 의도의 전달, 소위 관객과 소통하려는 의지보다는 형태를 통해 ‘자기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에 있으며, 이것이 관객의 체험을 이끄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관객의 체험을 이끄는 장재민의 ‘자기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작가의 의식이 개입하는‘자연의 인간화’의 결과물로서 ‘형태’다. 그의 그림에서 간혹 나오는 인간의 모습이 적어도 나에게 어색한 것은 ‘인간의 인간화 과정’이란 말이 어색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그림은 인간의 실존과 같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자연을 인간의 의식으로 형태화하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에 더 충실한 듯하다. 장재민의 그림 안에 존재하는 자연의 인간화 과정은 형태의 갈등 이전에 아직 설익은 자기 개념을 내보이려는 여타 작업과 구별되는 지점으로 작품 자체를 응시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두 번째는 자연의 인간화 과정을 실현하는 손의 흔적과 그 조합이다. 장재민은 “어떠한 상황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신체적 개입을 통해 대상과 나의 거리를 좁히려는” 의지를 손으로 표출한다. 그림은 결국 손으로 그려진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자신의 신체일부인 손의 힘으로 자연을 압축해간다. 관객은 작가의 의식의 추상을 캔버스에 흐르는 감각에 의존한 우연으로 감지한다. 들뢰즈(Gilles Deleuze)에 의하면, 캔버스의 손으로 만든 흔적(manual marks)과 같이 선택된 우연은 그것을 구성하는 정도에 따라 회화의 행위 속으로 통합되고, 그때 비로소 회화적인 것이 된다. 장재민의 그림도 이러한 경로를 거친다. 붓질의 리듬과 물감의 흐름, 자연과 인간의 선(線) 사이의 모호한 경계, 자연과 인간의 팽팽한 긴장을 한순간에 시각과 촉각으로 전환하는 캔버스위의 물감의 뭉침과 꺾임과 패임은 그의 우연한 선택과 손으로 이루어진 개개의 흔적들이다. 이러한 손의 흔적들이 조합하여 하나의 형태를 구성하면서 장재민의 그림은 완성된다. 

세 번째는 생명력이다. 그의 그림은 살아 꿈틀댄다. 이것은 사상, 철학 이전의 본능적인 감각으로 원초적이다. 무언가를 감추거나 드러내려는, 그의 그림은 감추는 쪽에 더 가깝지만, 마음을 솔직하게 전달하는 두터운 마티에르는 생동한다. 두꺼운 붓으로 작정한 듯 물감을 찍어 넣은 흔적은 작가의 의식적인 행위를, 곳곳에 흘러내린 물감의 궤적은 작가의 무의식과 질료의 반응을 강조한다. 또한 그리는 중에 변화하는 의식의 축적을 지시하는 덧입혀진 물감은 사각의 캔버스를 뛰쳐나오기 직전에 급히 멈춘다. 캔버스 깊게 긁어낸 자국은 이런 멈춤을 더욱 극적이게 한다. 의식과 무의식과 질료들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행위와 급한 절제의 대비는 장재민의 그림을 꿈틀거리게 한다. 이런 꿈틀거림이 스케일이 큰 그림에서 더 잘 나타나는 것은 당연하다.  

III.

어떤 장소든지 그리는 가운데 처음의 모습으로부터 멀어지고 의식의 재현으로서 형태를 남기는 장재민에게 대상으로서 장소 그 자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그리는 행위를 통해 나타나는 색조의 정서, 선의 적절한 삭제로 드러나는 반추상의 형태, 덧입히고 긁어내 드러내는 물감의 야성과 같이 눈에 보이는 그 자체의 물질성으로 “대상 재현”이 아닌 오히려 장소성을 약화하는 자신의 풍경을 만든다. 

“저는 제가 온전히 그 장소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공백을 채워나가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그리고 그래야만 ‘대상 재현’이 아니라 그 기준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양해지고요”

장재민의 장소성은 회색조로 채워지면서 장소의 차별화는 사라진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장재민의 장소는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풍경을 위한 도구일 뿐, 그림의 목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소의 도구화’는 장재민의 작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여 객관적인 위치에서 장소를 바라보게 한다. 그만큼의 심리적 거리는 장소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혹은 그래도 된다는 심리적 여유를 주면서 작가에게 장소에 매몰되지 않는 객관성과 대상을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장재민이 “장소에 담긴 이야기, 감정, 후각과 청각적인 인상과 같은 보이지 않은 것을” 화폭에 담는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장소의 도구화에서 오는 심리적 객관화와 이로 인한 다양한 관점에 있다. 


장재민, <저수지 상류>, oil on canvas, 312 x 235 cm, 2020.

IV.

장재민은 의식에 따라 자연의 선을 지우고 그 위에 두터운 붓질을 한다. 그가 덧칠한 어두운 회색조는 역설적이다.  '작품에 색이나 의미가 적극적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누르는” 그의 의도는 붓질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감추려는 의도가 행위의 반복으로 나타나는 이러한 역설은 그림에 은폐성을 부여한다. 은폐의 느낌은 자연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다층적인 경험을 전하고자” 하는 장재민의 방식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의 이면을 표현하려는 의지와 함께 그 이면을 표현하는데 있어 자신의 의도가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하는 조심성 때문으로도 보인다. 또 자연을 조작하고 재구성하는 자신의 욕망이 드러나는데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이러한 조심성과 두려움은 자연의 선과 색을 변형한다. 나는 여기에 지금 장재민의 그림이 구상과 추상 사이를 노니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장재민의 그림은 시간이 갈수록 윤곽을 드러내는 선이 점차 사라지면서 물감으로 표면이 채워지는 경향을 보인다. 의식을 색으로 표현하는 그림은 기하학적이든지 단순한 색면이든지 대체로 보편의 형태로 수렴한다. 

V. 

그렇다면 앞으로 장재민의 그림은 의식의 형태화를 변주하면서 일정한 패턴으로 귀결할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다. 형태의 인간화와 추상은 이번 전시의 작품 내에서도 읽히지만, 2012년 이래 지금까지 이어져온 그의 작품에서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장재민이 도상(途上)에 있음을 말해 준다. 그곳은 구상과 추상 사이일 수 있고, 무의식과 의식 사이일 수 있고, 자연과 인간 사이일 수 있고, 자연을 재구성하려는 욕망의 억압 혹은 해방 사이일 수 있다. 이후 장재민의 그림만이 그 위치를 추인할 것이다.
(미술평단 139호, 2020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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