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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프로젝트 <철암그리기>의 한계와 지속가능성

심현섭

* 2021년 7월 현재, <철암그리기>는 할아텍 20주년을 맞아 태백과 서울에서 세미나 및 기념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공공미술프로젝트 <철암그리기>의 한계와 지속가능성

1. 공공미술프로젝트 <철암그리기> 현황

철암은 1989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 추진 이후 인구 감소에 따라 공동화하고 지역경제 침체로 인해 쇠락한 탄광촌으로 전락하였다. 다수의 지역공동체조직이 철암의 폐산업 시설과 유휴공간을 활용한 공공사업을 전개하면서 마을 재생 비전을 제안하였다. 이런 비전은 주로 외부에서 유입된 단체의 협력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주로 철암의 건축물과 선탄장 시설 등 탄광촌의 독특한 풍경을 보존하여 지역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지역경제개발을 원했던 대다수 주민들로 하여금 외부 단체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고, 주민들 간의 충돌과 분열의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지역의 취약성은 가중하였다. <철암그리기>는 2001년 철암 건축도시작업팀 주대관 소장의 제안에 따라 서용선, 류장복, 이경희가 시작했다. 

<철암그리기>는 외부방문자가 중심이 되어 철암이라는 공적공간에서 미술 활동을 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이다. 외부자의 예술적 동기에서 시작하였지만 지속적으로 지역사회 이슈에 관여하고 참여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잔 레이시(Suzanne Lacy)가 정의한 새로운 장르의 공공미술이기도하다. 이들은 2001년에 결성된 이래 철암을 매달 1회,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미술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대부분의 단체들이 일시적 또는 간헐적으로 철암에서 활동을 전개하는데 비해 이들은 현재까지 철암과 연계된 조형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철암그리기>의 활동 주체는 할아텍 관계자, 후원회, 태백시 행정관계자, 태백소재 시민단체, 지역주민, 주로 미술인들로 이루어진 <철암그리기>활동 외부방문자 등이다. 그동안 태백 구와우의 전시장 할, 철암 골뱅이 PC방 갤러리, 철암역 갤러리 등이 운영되었으나, 철암개발사업 진행과정의 건물 철거 등의 이유로 지금은 대부분 철수한 상태이다.

<철암그리기>전시는 태백, 홍천, 목포, 서울, 중국, 일본 등 다양한 지역에서 열렸다. 목포지역은 2007년, <목포그리기>라는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김경은은 이와 같은 <철암그리기>활동을 지역그리기, 주민그리기, 지역과 동화되기, 지역 확장하기 등 네 개의 범주로 나눈다. <철암그리기>는 2002년과 2003년 문예진흥기금 <찾아가는 예술지원> 사업으로 지정되고, 2003년 이후 지역사회개발과 관련한 심포지엄과 철암기록영화 시사회, 각종 방송 소개 등 활발한 사회참여를 시도한다. 이런 사회적 활동은 2010년 이후, 소강상태에 있다가 근래 들어 2014년 철암탄광역사촌에서 열린 <공공예술 프로젝트로서의 현 단계_철암 탄광역사촌의 진행과 전망>, 2015, 2016년도 문화예술진흥기금 <시각예술창작산실 공간지원> 확정, 2016년 <지역창작인 레지던스 지원 및 디자인 컨설팅 사업>, 2017년 <태백 삼방마을 디자인 컨설팅 사업> 등을 전개하면서 지역개발 사업에 다시 참여하는 중이다. 


2. 예술 활동을 통한 사회참여: 역사와 기억의 보존 

공공성, 역사성, 동시대성 등의 속성을 가진 공공이라는 전제를 달고 작업하는 공공미술은 동시대인의 삶과 사회에 밀접하게 연관되어있다. 예술주체, 특히 기획자들의 동기는 단체 활동의 성격과 내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서용선은 개인적인 동기유발의 시기를 1986년 영월 방문으로 기억한다. 당시 그는 도시와 시골의 커다란 문화 차이에 심각성을 느꼈다고 한다. 이경희는 근원적인 생명력으로 복구, 생활을 통해서 힘을 얻고자 하는 근본적인 욕구가 <철암그리기>의 동기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류장복은 사회적인 효용성이란 말이 함의할 수 있는 ‘어설픈 계몽주의’를 경계하면서 자신이 삶, 즉 예술가로서 생활이 철암이라는 장소와 만남으로 발생한 개인적인 동기를 강조한다. 대체로 초기 멤버들에게 <철암그리기>의 동기는 사회적 관심보다는 개인적인 동기, 즉 지역의 요구보다는 외부자의 필요에 의한 동기가 우선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수정은 <철암그리기>의 활동을 내면의 상처의 회복, 새로운 꿈을 꾸게 해준 계기, 새로운 삶의 시작 등 참여자의 내면을 성장시킨 공공미술로 보고 높이 평가한다. 이와 같이 <철암그리기>의 동기와 그 후 활동을 살펴보면 할아텍을 비롯한 외부방문자 중심의 순수 미술창작이 <철암그리기>의 동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철암그리기>의 활동이 외부인 중심의 미술의 자율성만으로 운영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주민과의 소통 의지, 지역 사업과 연대하고자 수차례 시도했던 심포지엄과 토론회, 폐광지역 문화 활성화를 위한 제안 등의 노력은 <철암그리기>가 외부인 중심에서 벗어나 지역 주민과 동화하고, 사회의 변화를 도모하려고 했던 사회성의 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철암그리기’라는 명칭으로 시작된 이 활동은 작가가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 사회활동의 한 부분임을 의식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철암그리기에서 그린다는 것은 그림 그리기의 뜻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와 미술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이 지향하는 그리워함에 대해(그것이 자연이든, 인간이든, 사물이든 간에)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활동을 뜻한다. 직접적으로는 철암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 그러한 산업도시의 풍경은 현재 발전하는 대도시의 안락함에 대해, 우리들의 풍족한 삶에 대해 안도의 느낌과 어느 정도의 죄의식을 남겨준다.' 

서용선이 <철암그리기> 활동 10년을 돌아보며 쓴 글이다. 여기에는 초기에 가졌던 개인적인 동기에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의식이 점증하고 있거나 잠복했던 사회성이 드러난다. 먼저 그는 <철암그리기>의 행위, 곧 작가의 제작 행위가 곧 사회활동의 한 부분임을 밝히면서 그리기라는 예술 활동의 영역을 확장한다. 확장의 선험은 ‘그리워 함’이고, 그것은 자연파괴, 인구감소로 인한 장소의 소멸에 대한 막연한 연민, 이를 방조하고 있었다는 동시대 사회인으로 갖는 실존적 죄의식이다. 서용선은 2012년 태백시에서 시행하는 철암의 광산도시 복원 계획을 지켜보면서 문화 형성에는 긴 세월과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선언하듯 “이것은 예술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행정과 정치와 작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토로한다. 류장복은 부채의식과 함께 고향으로서 장소의식을 느낀다.  

'탄광촌이라고 하는 곳이 압축성장의 근대화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치열한 삶의 무게감이 있는 곳이잖아요? 소위 지식인에게 일말의 부채의식을 느끼게 하는 곳이죠. 그런데 저는 그곳에서 고향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실향민이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을 때 받았을 법한 느낌이랄까요? 마음 안쪽에서 오는 환한 느낌, 폭 안기는 느낌이 들었어요.'

서용선과 류장복에게 철암은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이며, 압축적으로 진행된 근대화의 기억으로 남는 장소다. 이러한 부재의 결핍과 상실의 기억이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이 말한 대로 에덴에서 쫓겨난 최초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죄, 그리고 낭시(Jean-Luc Nancy)가 서구문명의 시원으로 보는 그리스도로부터 몸의 분리와 율리시즈의 떠남에서 비롯되었는지는 몰라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이 서로 억압하지 않고 평등하게 사는 사회·정치·문화적 기호로서 ‘고향’에 대한 갈망은 인류의 보편적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고향을 기억하고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이 없으면 예술은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가 지적한대로 의미 없는 풍자(caricature)로 전락한다. <철암그리기>의 활동은 이런 맥락에서 비록 더딜지라도 작업 행위와 작품으로 고향을 회복하려고 하는 사회적 예술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예술 활동을 통한 사회 개입의 결과는 <철암그리기> 외부방문자들의 변화에서도 감지된다.  
 
'못돼 먹은 나는 나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철암을 인간 조건의 한계상황으로 전락시키고 그곳을 연민하며 내 삶의 우월감을 찾아낸다. 살기 위해 그리한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러다 보면 그 곳이 나의 다른 이름으로, 그곳 노동자의 삶이 나와 다른 시간의 같은 운명으로 일치되는 동정심을 느낀다. 이는 또 무엇인가?'(이종미)

3. <철암그리기>에 나타난 소통의 한계와 지속가능성 

1) 예술창작활동가의 지역참여의 한계: 이익의 상충 

공공미술이 공공의 자본과 행정력을 사용하는 미술로서 대중의 이익에 기여해야 한다고 했을 때, 공공미술로서 <철암그리기>는 대중이 속한 지역사회의 이익에 기여해야 한다. <철암그리기>는 지역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철암그리기>를 주도한 초창기 멤버들의 동기는 여타 관계자들이 가지고 있는 지역개발에 대한 기대보다는 작가로서 개인적인 욕구가 더 강하게 작동했다. 동기의 차이는 지역개발에 대한 이견을 드러냈다. 

'창작 행위들은 지역의 예민한 정서를 다행스러울 정도만큼 빗겨나 있었다. 그럼에도 예술가들의 행보가 늘 정치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도시건축팀, 시공무원이나 유관기관, 관변단체, 상이한 견해의 지역민들과의 관계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개별자로서 나는 무장공비처럼 철암 곳곳을 염탐했고, 때때로 중앙에 보고하기도 했다. 욕보거나 배척당하는 기분이 들 때면 공연히 귀순하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한응전)

개발에 대한 이견은 2003년에 태백종합예술회관에서 실시된 <태백시 예술 환경을 위한 패널토론>의 발표에서 드러난다. 철암의 역사와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입장은 할아텍의 기본적인 인식이었다. 개발을 하되 새로운 시설의 도입이나 타 산업의 유치보다는 광산산업의 흔적을 유산으로 남기는 자연친화적인 역사도시로 개발할 것을 주장한다. 여기에는 기억과 역사를 담고 있는 철암을 재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미술가의 욕구가 반영되었다. 반면 철암 지역주민들은 경제 산업의 유치를 바라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카지노 설립과 보상 문제를 둘러싼 지역주민, 단체들 간의 알력 속에서 <철암그리기>에 대한 내부자들의 부정적인 인식을 키우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2010년 <100회 기념 세미나>에서 당시 태백시 배일환 계장은 할아텍의 활동이 지역주민에게 무슨 자극이 되었는가? 왜 철암이 아닌 함태에서 전시를 하려고 하는가? 주대관 소장이나 할아텍의 활동이 시민들의 필요를 채웠는가? 라며 철암그리기 활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이와 같이 <철암그리기>측과 지역주민 등 내부자의 갈등 상황에는 경제개발과 문화개발로 대별되는 방법의 차이와 함께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경제활동의 장소와 작가의 순수성 회복과 재현의 대상으로 예술 활동의 장소라는 상충된 입장차이가 작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 창작활동과 삶을 통합하였다거나 이후 미술관 설립 시 필요한 작품을 확보한 일에 대해 의의를 두는 <철암그리기>의 입장은 문화예술의 관점에서 타당할 수 있으나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한 지역 주민에게는 삶과 유리(遊離)된 수사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유리는 서용선의 언급에서도 드러난다. 

'공공 작업은 좋은데 실제 주민들은 싫어한다. 그런데 작가들은 그걸 밀고 나간단 말이에요. 그건 우리에게 신념이 있기 때문에 (…) 그게 더 긴 시간을 두고 본다면 주민 한 사람, 몇몇이 문제가 아니라 더 많은 대중이, 나중에 철암 자연이 복원되고 했을 때, 그 근거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를 어떻게 보느냐, 없었던 게 낫다고 따지기 힘들다고 봐요. 우리의 경험으로 봐서는 그게 가치가 있다고 봐요.'

서용선의 본의는 아닐지라도 위와 같은 언급은 미래에 결정될 상황에 대한 기대 때문에 지금 현재의 문제를 단순화하고 무엇보다 이주라고 하는 생존의 문제 앞에 서있는 현지인을 대상화하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예술의 절대화, 문화제일주의의 폐쇄적 실천으로 나아갈 가능성과 함께 관광주의의 한계를 노출할 수 있다. 삼방동 시민자치위원회에 속한 철암시민인 이찬우는 2014년 4월에 열린 <철암탄광역사촌: 공공예술 프로젝트로서의 현단계-철암탄광역사촌의 진행과 전망>(이하 2014년 세미나)에서 “할아텍 역시 철암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닌 ‘들리기’가 되어가고 있다”면서 <철암그리기> 활동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태백미협회장이었던 김기동은 지역작가로서 할아텍은 기분 나쁜 단체라고 지적한다. 사실여부를 떠나 이러한 언급은 할아텍이 지역단체나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방법론에서 일정정도 오류를 범했음을 드러낸다. <철암그리기>가 추구한 삶과 예술의 일치와 장소성은 지역주민과 맺는 관계보다는 작가로서 대상을 재현하는 철암이라는 장소를 제3자의 입장에서 그리는 행위와 자신의 삶의 일치를 가리키는, 미술인 자체로서 완결되는 사고구조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지역경제개발에 대응하여 문화개발을 강조하고, 광산문화의 철거에 맞서 보존을 주장하는 <철암그리기>의 입장에서는 ‘그들만의 리그’로 평가받는(김경은)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와 맞물린다.    

2) 창작활동과 지역행정의 상호 불이해

<철암그리기>와 지방행정의 소통 또한 그다지 원활하지 않았다. <철암그리기>는 서울에서 온 작가들에 대한 지방 정부의 배타적 태도와 무관심 때문에 자력으로 조형 활동을 하거나 ‘고원자생식물원’, ‘태백문화원’ 등 지역 민간단체와 협력하면서 창작 활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행정과 소통을 나누는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기는 지역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2014년 세미나에서 일부 주민들에 의해 소동이 일어나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태백시 행정의 불통에 대한 불만이었다. 행정 관료로서 편의상 단체대표 등과만 소통한 결과, 일반 주민들의 소외가 누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불통의 책임이 지역행정관계자에게만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할아텍이 지역관계자, 주민 등과 소통하기 위해 세미나를 개최하는 일 등 대화의 물꼬를 튼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통은 주체사이의 책임 있는 반응의 축적된 결과이며 어떤 경우든 공공미술의 핵심적인 주체는 미술전문가집단이라는 점에서 반성을 요한다. 내부자와 외부자 사이의 원활하지 않은 소통의 예로 <철암그리기 100회 기념 토론회>를 들 수 있다. 당시 태백석탄 박물관 관장이었던 정연순은 할아텍이 지역사회 문제에 더 깊이 관여하기를 바라면서 법인 설립과 지역단체와 협력의 필요성을 제언한다. 태백시 계장 배일환은 할아텍의 활동이 지역주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으며, 어떤 필요를 채웠는가라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외부자들이 <철암그리기> 내부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심층적인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지자체 지원이 없는 것이 <철암그리기>의 지속의 원인이었다거나 정치적 연결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외부자 중심의 원론적인 논의가 이어진다. 

정치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이 <철암그리기>의 지속적인 운영과 예술의 자율성을 위해서 지켜야할 원칙으로 중요하지만, 이러한 외부인의 언급과 태도는 지역관계자 등 내부인에게는 자칫 일종의 ‘거리두기’로 인식될 수 있다. 철암의 개발 방향이 현주민의 생계와 직결된 사안으로 내부인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예민한 사항이었음을 감안하면 토론회에 나타난 외부인들의 발언은 도시인의 관광주의로 비칠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공공미술의 성공을 위해 지역주민 및 행정 관계자 등과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대승적 차원의 협력이 중요하다고 할 때, <철암그리기>가 지역행정 및 단체의 관계에서 드러낸 상호 불이해는 아쉬움을 남긴다. 

3) 지역사회와 거리두기의 역설: 비정치성, 무지원의 자율 원칙이 낳은 지속가능성

<철암그리기>의 지역내부자들과 맺은 일정한 거리두기가 역설적으로 다른 어떤 외부단체의 활동보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결과를 낳은 점은 흥미롭다. 2001년 이래 2017년 10월 현재까지 철암에서 공공미술 활동을 이어온 단체는 할아텍의 <철암그리기>가 유일하다. 이렇게 <철암그리기>를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로 비정치성과 무지원의 자율 원칙을 들 수 있다. 이는 예술이 사회와 맺는 하나의 방식을 시사한다. 지원으로부터 자유롭고, 정치와 연루되지 않을 때 미술활동은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할아텍 관계자 진예는 7년간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작가의 그림이 좋아지고, 자연스럽게 철암의 풍경 속에 흡수되는 가운데 주민들의 이해가 생기고 최초로 철암역에 갤러리가 들어섰다는 점을 들어 작가의 의지와 소신이 일궈낸 <철암그리기>의 성과를 긍정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공공미술의 성공을 위한 조건으로 비정치성, 자금으로부터 자유, 미술가들의 예술적, 사회적 소신 등을 제시하는 한편, 공공미술의 지속성을 위해서 자본과 행정, 지역의 이익 등 주변의 고려사항과 어느 지점에서 조율 혹은 타협하면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가라는 소통의 범위와 방법에 대한 숙고를 요구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미술인의 확고한 조형의지와 소신을 바탕으로 비정치성, 무지원의 자율 원칙을 지켜나갔던 <철암그리기>의 지속성은 공공미술의 한 전범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4. <철암그리기>의 예술적 의의 

<철암그리기>의 예술적 의의는 공공 미술의 난제로 꼽히는 전체주의를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거나, 그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 미술의 장애물 중 하나는 전체주의다. 핵심주체에 의해서 이미 정해진 정체성을 하부에 강제하는 전체주의적 경향이 구성원 모두가 평등한 상태에서 의견을 제시하고 협의해나가는 장의 마련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암그리기>는 처음부터 구심점과 기획이 없는 프로젝트로서 전체주의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한눈에 일목요연하게 무엇을 하는지 파악하게 하는 인위적인 틀(대개는 이것을 ‘조직’ 혹은 ‘기구’라 할 수 있다)이 없다. (…) 이들은 처음부터 일반적인 공공미술프로젝트와 다른 방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 결과적으로 철암에서의 활동은 개별 작가들의 삶의 한 경험으로 간주되고 그 과정에서 작가들은 사고의 확장 혹은 심화를 경험하게 된다.'(하수정) 
 
<철암그리기>의 비정형은 다른 공공미술과 구별되는 특징이다. <철암그리기>는 작가들이 스스로 회의하고 결정하며 일을 진행하고, 실제 환경 속에서 틀을 규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작가 개개인의 작업들을 동시에 진행함으로써 작가의 사고를 확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그 범주가 외부인에 한정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이미 주어진 어떤 틀을 최소화하고 작가공동체 내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철암그리기>활동은 공공미술의 난제인 전체주의를 배제하고 개개인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협의의 장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두 번째 공공미술로서 <철암그리기>의 예술적 의의는 구체적인 장소로서 철암을 지정한 ‘장소지정’과 프로젝트를 17년 동안이나 유지하고 있는 ‘지속성’이다. 지속성이 미술가의 공공미술의 책임의 정도와 작업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 중 하나라고 할 때 <철암그리기>의 의의는 각별하다. 공공미술이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원의 지원체계가 원활하여야 하는데 <철암그리기>의 경우, 예술커뮤니티를 이룬 핵심관계자, 외부인 등의 자율적인 운영시스템이 이를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지속성’과 함께 새로운 공간과 장소를 창출하는 작업이라는 관점에서 구체적인 장소를 지정하고 이를 역사와 기억의 장소로 바꾸려고 하는 <철암그리기>의 ‘장소지정’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장소는 존재의 진리가 소재하는 역사의 장이다.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장소를 잃어버리면 광장에서 담론과 공동체로 나아온 장소와 미술의 긍정적인 변화를 향한 지금까지의 노력을 추상화해버릴 가능성이 있다. 또 “추상적이고 가상적인 공간 이해는 구체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흔적을 지우며, 그 장소와 연결되어 작동하는 그들의 심리적 구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따라서 <철암그리기>가 사회·정치·문화적 기호로서 ‘고향’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철암이라는 지역으로 구체화하여 지속적으로 활동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철암그리기>는 철암에서 일어났던 산업화의 역사와 개인의 기억을 보존하는 미술활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는 할아텍의 <철암그리기> 활동이 없었다면 지금 미술계가 7-80년대 한국의 경제개발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탄광도시 철암의 역사와 장소적 의미, 문화적 유산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증명한다. 사라져버릴 가능성이 짙은 허름한 건물 벽에 정성스럽게 붓질을 하였던 <철암그리기>의 행위는 크고 화려한 것, 힘 있는 것만을 기억하려는 인간의 속성을 거슬러서 작고 초라한 철암/사람의 역사를 지향하며 소외된 자의 시점으로 철암을 기억하는데 기여한다. <철암그리기>의 기억은 철암이 탄광도시 시절부터 가지고 있었던 정치·사회·경제적 사건, 의미들을 현재로 소환하여 오늘날 도시 재생 과정에 각인하려는 의식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철암그리기>의 기억보존의 노력은 할아텍에서 해마다 발간하는 백서로 나타난다. 미술 작업 활동의 효과는 보고서, 문서정보를 통해 증폭된다. 이 단계에서 미술작업은 예술문헌이나 공동체의 삶 속에서 공동으로 보존되는 일종의 가능성이 된다. <철암그리기> 백서가 외부 소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철암/사람의 기억을 우리 모두의 기억으로 보존·확장하거나 적어도 그 가능성을 높이는 매개의 역할을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아가 다수의 역사에서 배제되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있는 사회적 소수자를 그리기와 쓰는 행위를 통해 공동의 기억으로 불러들이는 <철암그리기> 활동은 공식적인 기억을 보완하는 동시대 대안기억의 축적이기도 하다. 
 
<철암그리기>는 소외된 지역의 현실을 직시하려는 사회참여적 시선의 회복과 공동체 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예술의 대상은 작가의 선택이자 의식의 표출이다. 예술 활동으로서 <철암그리기>는 철암이라는 지역을 한국 산업화 시대의 아픈 상처로 인식하고 끌어안고자 하는 공동의식, 혹은 공동체성의 발로였다. <철암그리기>가 자기 밖,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지역과 사람들을 향하여 시선을 돌리고 있다는 점은 한국 미술의 균형과 조화를 위하여 가치 있는 일이다. 소외된 자를 향한 시선은 실제 자연환경의 현실을 보고 체험하려는 진경의 정신, 우리 땅과 문화에 대한 자각과 역사의식과 일맥상통하는 정신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현실은 한국 산업근대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광산지역의 폐허화, 인간의 무모한 희생, 아직 남아있는 아름다움 등 철암의 현황을 가리킨다. 김형숙에 의하면 철암을 바라보고 이를 직접 사생하는 드로잉은 중심(고급예술/전시)과 주변(대중미술/지방)의 경계를 해체하고, 부재의 공간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이는 제도와 자본으로 이루어진 대도시를 대변하는 갤러리를 탈피하여 쉼터이며 작업장으로서 세상에 나온 것을 의미한다. 중심과 주변, 대도시와 몰락한 소도시의 경계를 허무는 <철암그리기>의 사회참여적 시선은 외부인들에게 소외된 지역/사람에 대한 공동체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했으며 지속적인 활동의 동력으로 작용한다. 

할아텍의 진경 정신은 추상과 대비되는 리얼리즘의 회복과도 궤를 같이하는데 이 또한 <철암그리기>의 예술적 의의이다. 한국의 리얼리즘은 전후 이쾌대 등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화가들이 월북하면서 그 공백이 커진데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서구 앵포르멜과 액션페인팅의 영향아래 세력을 이룬 추상회화가 급부상하면서 위축된다. 1980년대 민중미술이 잠시 그 맥을 잇는 듯했지만 예술성의 한계 등으로 소멸하면서 한국 미술의 리얼리즘은 그 방향을 잃고 만다. 존 버거(John Berger)에 의하면 이러한 리얼리즘의 소멸은 현실의 한 측면을 더 명확하게 인식하는 방식의 약화를 뜻한다. <철암그리기>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한국 미술이 잃어버린 리얼리즘의 재창출을 시도한다. 

'마지막 인간이 가야할 곳, 자연에 대한 풍경 관찰의 전통을 훌라당 벗어 던지고 양복처럼 갈아입은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을 고발하는 심정으로, 석탄 더미 속에 감추어져 이제는 구멍 뚫린 산맥의 정기를 느껴보고자, 정성 어린 시선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태백시 철암동까지 비쳐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관찰했던 햇빛에 의해 남루해져가는, 녹색 비닐포장의 부드러운 피부에 마지막으로 꽂아본다.'(서용선)

'민중미술과 모더니즘 회화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고민을 했었죠. (…) 어디에도 거처를 잡지 못하고 있던 그런 와중에 우연히 철암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 아무런 생각이라도 멈춘 상태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 철암 가기 전과 후가 그렇게 달라졌던 것 같아요.'(류장복)

철암을 본 이후 본격적으로 사생을 시작한 류장복에게도, 철암에서 자연 풍경 관찰의 시선을 조율한 서용선에게도 <철암그리기>는 현실을 인식하는 리얼리즘을 회복하는 계기였다.  


5. 남은 숙제

<철암그리기>는 철암지역의 개발을 바라보는 관점과 방법에서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공동체의 현실적인 구현은 이익의 공정한 나눔을 전제하였을 때 가능하다. 보존과 철거라는 양쪽의 입장과 이익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양자택일보다는 보존과 철거의 조화라는 양가의 태도를 검토해야 한다. 보존을 기본으로 한 <철암그리기>의 문화도시 개발방향이 지역민들의 요구와 차이를 보인다 하더라도 철암주민의 경제적 욕구를 일정 정도 수용하는 전향적인 자세가 바람직하다. 이는 주디스 바카(Judith F. Baca)가 말한 대로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주체의 구상 중 어느 것을 공공공간에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미술의 자율성을 지키면서 동시에 지역주민들의 구상과 현실적으로 연대하는 접점을 찾는, 즉 미술가와 현 주민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를 좁혀야 한다. 특히 철암 개발 사업이 현 주민들의 이익 혹은 생존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사안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지역주민과 지역행정 및 지역단체와 소통의 장을 확장하고, 각 주체들 간의 협력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구체적인 예로 해마다 발간하는 백서에 주민과 나누는 공론의 장이 없다는 점은 재고해야 한다. 지역소식란을 개설하고 지역주민과 행정 관계자의 글과 동향을 함께 싣는 글을 보완하면 철암지역/사람의 역사를 보존·기억하는 결과와 함께 소재의 발견 과정 자체가 소통의 한 방법으로 작용할 것이다. 글쓰기를 위한 협력과정에서 나눠지는 대화는 외부인만으로는 충분히 실현될 수 없는 종류의 미술, 예를 들어 내부인의 집단기억을 예술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아울러 2010년 이후 뜸해진 지역개발을 위한 토론회 등을 더욱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 이 때 고려할 사항은 한응전의 지적대로 일방적인 발제와 질의응답식의 세미나 이전에 지역민들의 발언들을 먼저 들어보는 자리로서 토론회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하는 열린 마음으로 상대 의견을 경청하고 답변하는 ‘이상적 담화 상황’의 세미나를 기대한다. 이와 함께 전시회, 마을꾸미기 등에서 지역주민의 참여도를 높이는 방안을 끊임없이 강구하여야 한다. 이런 면에서 2017년 <태백 삼방마을 디자인 컨설팅 사업>에서 지역주민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는 <철암그리기>의 노력은 고무적이다. 

지역행정 및 지역단체와 소통도 마찬가지다. 지역개발과 관련한 공공미술은 결국 지역 단체와 행정의 협력을 요한다. 비정치성, 무지원의 자율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극적으로 협력의 틀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2014년 세미나에서 태백고생대 자연사 박물관장 정연순은 할아텍의 철암백서가 가지고 있는 내용의 중요성과 활용을 강조하면서 할아텍과 강원도 미술협회의 협력을 촉구했다. 예를 들어 2010년 백서에 담긴 서용선의 태백시 예술 환경을 위한 제안은 지금도 여전히 유용하다. 지금까지 발간한 백서를 분석하여 이를 바탕으로 지역주체들과 다양한 접촉을 통해 백서의 내용을 나누고 공감대를 넓힘과 동시에 필요시 지원을 받아들여 함께 일을 만들어가는 분위기 조성이 중요하다. 
 
지금까지 <철암그리기>가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작가 등 외부자 중심의 자율적인 운영에 기인한다. 이제 그 힘을 지역내부자들의 이익 공유와 협조체계를 구축하는 일에 배분한다면 역사와 기억의 장소로서 문화예술도시 철암을 건설하려는 <철암그리기>의 이상은 한층 구체화될 것이다. 

(한국예술연구, 2018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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