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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원의 장소 특정성 이론에 나타난 공동체 불가능성과 장소해제의 문제

심현섭

권미원의 장소 특정성 이론에 나타난 공동체 불가능성과 장소해제의 문제



1. 들어가며 


권미원에게 장소는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제도 등 인간의 역사가 맞물려있는 역사의 축적물로서 의미의 함축, 즉 기호의 의미를 담고 있다. 권미원의 책 제목이 가리키는 ‘또 한 장소’는 차이 없이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장소이다. 이는 ‘장소 정체성’을 상실한 장소로서, 지리학 등에서 말하는 장소이론의 ‘장소상실(placelessness)’로서 다양성이 사라진 획일화한 현대 장소의 특징을 가리킨다. 권미원은 장소성이 살아있는 다양한 장소의 건설을 위해 미술이 감당해야 할 역할과 방법을 장소특정성 미술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다. 본고는 유목주의적이고 탈영토화된 사회와 문화에서 권미원이 새로운 장소의 건설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한 ‘장소 해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권미원의 장소 특정성 이론의 분석을 통하여 그의 ‘장소해제’가 장소를 추상화하여 결국 자신이 추구한 차별화된 장소를 지연시키고 방해하는 모순을 낳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2. 미술에서 장소 개념 도입과 그 의미


건축, 지리학 등 공간과 장소에 대한 사유의 길잡이는 하이데거(M. Heidegger)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전 사유과정을 축약해서 말하면 “인간존재의 장소성 귀환” 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의 기술은 인간의 욕구 충족을 위해 정복하고 개발과 가공을 거쳐 인위적인 방식으로 처분하는 것이다. 인간과 대상 사이에 기술적 조작이 매개함으로 사물과 인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이리하여 사물 존재와 인간 존재를 포함하는 모든 존재자는 예외 없이 그 자신을 잃어버린다. 오직 기능적 연관 관계 속에서만 존재 의미를 갖는 부속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존재의 위기로 인해 인간 존재 및 모든 존재의 상실과 본질(본성)의 위기를 초래한다. 장소를 인간이 존재의 이웃으로 거주하고 뿌리내리는 “고향”으로 파악한 하이데거에게 기술에 의한 존재상실의 시대는 “현대인의 고향상실(modern homelessness)”의 시대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정하든 안하든 창공에 꽃 피우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의 뿌리를 땅으로부터 일궈내야 하는 식물”이다. 20세기 들어 일련의 학자들이 우리의 뿌리를 땅으로부터 일궈내는 작업을 전개한다. 형이상학적인 하이데거의 참다운 장소는 공간에 대한 건축현상학적 접근을 시도한 노베르그-슐츠(Christian Norberg-Schulz)에 의해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 적용되었다. 공간의 시대’에 대한 담론이 급증하는 데는 공간 연구의 선구자, 르페브르(Henri Lefebvre)와 하비의 영향이 크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장소와 공간, 장소감과 장소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본격화한 렐프(Edward Relph)의 이론을 중심으로 그 개념들을 살펴본다.



3. 장소에서 공동체로


권미원은 60년대 이후 장소 특정적 미술의 계보를 현상학적, 사회적/제도적, 담론적 패러다임의 변화로 해석하였다. 그는 장소 특정적 미술의 계보를 정리하고 “장소의 실질적인 정의가 물리적 근거가 있는 고정적이고 실제적인 입지로부터 유동적인 가상의 담론적 벡터로 전환하였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이어 권미원은 오늘날, 장소 특정적이고 장소 지향적인 미술의 진정성과 같은 전통적인 미학적 가치, 저자의 역할, 비물질과 반상품의 위상, 유목주의의 시장자본화 등 네 가지 측면에서 담론 기반미술을 검토한다. 이에 대한 권미원의 검토 결과는 부정적이다. 특히 지배문화, 자본주의와 미술의 관계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장소가 차별과 개성이 없는 무장소로 전락한데는 장소 특정적 미술에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고 본다. 미술이 장소에 통합되어 장소를 ‘상품화’하고 ‘시리즈화’하면서 장소의 차별을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즉 장소 특정적 미술이 지배문화와 자본주의에 포섭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술은 자본주의의 포섭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권미원이 공동체 기반미술에 관심을 돌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에서 권미원은 공공미술을 세라의 조각에 토대를 둔 분열적(disruptive) 모델과 에이헌의 공동체 상호작용에 토대를 둔 동화(assimilate)로 구분하고 ‘개입적인’ 장소 특정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즉 작가가 어떻게 공동체에 개입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공동체 기반미술이 미술이 새로운 장소를 만드는 대안이라면, 미술 혹은 작가는 어떻게 공동체에 개입해야 하는가? 



4. 공동체의 불가능성과 집단적 미술실천


권미원은 공동체 개입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에 의해 명명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예로 1993년의 퍼포먼스 <행동하는 문화>를 든다. 여기에서 권미원은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발견한다. 그 이유는 공동체의 획일화한 정의규정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자신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불공평한 권력관계를 악화시키고 이미 소외된 이들을 다시 주변화, 식민화하며, 미술의 과정을 탈정치화 및 신화화함으로써 미술과 삶의 분리를 더욱 심화시키기 때문이다. 권미원은 아이리스 마리온 영(Iris Marion Young)이 지적한 공동체 기반 미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 즉 집단 정체성에 매몰된 구성원 개인의 정체성 상실, 집단 정체성이 가지고 있는 왜곡된 권위의 은폐 가능성, 동질적인 집단 구성체 보호를 위한 차이의 억압 등을 근거로 ‘공동체의 불가능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렇다고 미술가들의 모든 기획을 포기하는 것은 조급한 패배주의이다. 권미원은 공동체 기반미술의 대안으로 협업과 공동체의 대안적 가능성을 그려볼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먼저 공동체에 대한 재개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권미원은 공동체의 재개념을 위해 장-뢱 낭시(Jean-Luc Nancy)의 ‘무위의 공동체’를 인용한다. 그러면서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넘어서기 위한 방안으로, ‘공동체 기반 미술’과 대립되는 ‘집단적 미술 실천(Collective artistic praxis)’을 제시한다. 이것이 공동체에 대한 단정적인 장소 선정(siting)의 부담을 넘어선 장소해제(unsiting)를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5. 권미원의 모순: 공동체 불가능성과 장소해제(unsiting)의 문제  


권미원이 장소 특정성 미술의 대안을 모색하면서 던진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정하는 것은 공동체나 그 가치가 아니라 그 실현 가능성이다. 공동체가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로서, 계급적 권위와 전체주의 때문이다. 이는 공동체가 추구했던 가치와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서 권미원은 공동체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태도보다는 지금까지 역사에서 이루진 적이 없는 공동체가 과연 실현 가능한가라는 비변증적 관점으로 혼란과 불확실성 안에 이루어질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공동체와 공동체적 가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집단적 미술 실천, 장소해제 등을 제시한다. 그러나 집단적 미술 실천에서 말하는 프로젝트 스스로 만들어지는 집단은 사실상 공동체 기반 미술의 공동체와 이름만 다를 뿐 그 실제적인 역할에 있어 크게 다르지 않다. 현실적으로 쟁점과 관객의 참여가 중요시되는 공공미술에서 공동체(집단)의 형성은 불가피하다.


     권미원의 집단적 미술 실천 또한 내용적으로, 공동체의 새로운 형식이라기보다는 건전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필요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평등한 태도, 겸손한 자세와 같은 도덕률을 강조한 공동체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권미원은 자신의 방법론을 구체적인 공동체와 동일시하면서, 건전한 공동체의 건설을 위한 실천의 어려움을 곧바로 공동체 자체의 불가능성으로 환원해버리는 오류에 빠진다. 권미원이 이런 논리의 연장선에서 장소 미지정과 장소 해제의 길을 발견한 점은 당연한 귀결로 보이며, 그것은 권미원 논리의 추상성과 비현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장소의 지정 없이 어떻게 집단적 미술 실천이 가능할 것이며, 지루한 ‘또 한 장소’의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가. 


권미원과 달리 하비는 장소와 예술의 연관성을 피력했다. 하비의 언급에서 주목할 점은 그가 창조적인 예술작품의 번성이 자연 토양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면서 “이 같은 뿌리를 잃어버리면, 예술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었던 의미 없는 풍자(caricature)로 전락한다. 따라서 문제는 의미 있는 뿌리가 정착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고향을 회복하는 일이다. 장소 건설은 뿌리를 회복하고 거주의 예술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 점이다. 이는 장소성의 회복에 있어 예술이 감당할 역할을 역설한 것이다. 반면, 권미원의 장소 해제는 공동체의 관념화, 즉 공동체를 의식 속에서만 인식하는데 만족하고,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공동체 건설에 대한 의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실제적인 장소, 지정된 지역을 간과하면 권미원이 시도한 새로운 장소 또한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적인 장소의 무-개성(無-個性)을 장소특정성 미술로 극복하려고 시도했던 권미원의 입장에서 이것은 모순이다. 이 같은 모순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권미원이 불가능하다고 본 공동체에 대한 담론을 복기해야 하는데, 그 시작은 그가 장소 특정적 미술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했던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공동체란 무엇인가. 이 논의에서 나는 공동체/성의 실현이 미술이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주장하고 도전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에 속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공동체 실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은 포기해서는 안 될 숙제이며, 특히 그 도전이 구체적인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할 것이다.  


     권미원은 공동체 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오만함을 비판하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 개념을 적용하여 구체적 장소의 선정을 포기하고 해제하는(unsiting) 가능성을 열어놓음으로써 장소를 기반으로 한 공동체의 구체성을 희석하고 추상화하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데모스 또한 권미원이 장소를 지리학적 혹은 물리적 장소 대신 담론의 영역으로 대체하면서 물리적 실재, 역사성이 제거되었다고 보고, 그 논리의 한계를 지적한다. 이러한 장소의 추상화는 권미원이 비판했던 ‘또 한 장소’의 반복을 개선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공간의 역사성에 천착하는 카를 슐뢰겔(Karl Schlögel)은 “모든 사건과 사고에는 사람뿐 아니라, 그것이 일어나는 장소도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 어떤 역사적 기술도 장소에 대한 언급 없이는 구성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람과 역사와 장소의 불가결한 관계를 지적한 것이다. 하비의 말을 원용하면 공동체 기반 미술로 진화해온 장소 특정적 미술은 실제적이고 지시적인 장소를 기초로 했을 때 비로소 예술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장소 특정적 미술이 담론을 기반으로 하든,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든 구체적으로 기능하는 장소를 잃어버리면 미술관에서 광장으로, 광장에서 담론과 공동체로 나아온 장소와 미술의 긍정적인 변화를 향한 지금까지의 노력을 추상화해버릴 가능성이 있으며, “구체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흔적을 지우며, 그 장소와 연결되어 작동하는 그들의 심리적 구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있다.”  권미원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획일화한 장소의 반복과 이로 인한 개인과 공동체의 정체성 상실은 최병두가 지적한대로 현대사회에서 장소성 재생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자마저 장소성 상실의 원인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한 결과인지 모른다. 우리가 장소의 개선과 변화와 공동체의 회복을 원한다면 지난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지시된 장소에 대한 탐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6. 나가며


권미원은 미술과 장소의 관계를 통해 장소개념의 중요성을 부각하여 통찰력 있는 분석과 이론화에 성공했다. 특히 장소를 인간 역사의 축적물로 보고 공동체 기반미술과 공동체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시도하여, 열린 체계로서 집단적 미술 실천의 중요성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유목주의가 창궐한 시대에 정착주의의 공존을 재고함으로써 무개성적인 반복을 일삼는 오늘날의 장소에 대한 사유의 폭을 넓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불가능성이라는 성급한 결론과 그 결론을 바탕으로 내놓은 장소해제 등의 대안에 함의된 장소의 관념화는 자신이 추구한 장소의 개선을 오히려 늦추거나 제지할 위험에 노출하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권미원 스스로가 말했듯, 장소에 대한 사회학적(권력, 경제 등) 역학관계에 대한 분석이 없으면 자족적인, 관념적인 환영, 곧 관념주의의 환영에 빠져든다. 사회학적 역학관계 분석은 실제 장소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이 사는 장소는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배경이 각각이다. 각기 다른 특수한 장소를 보편화된 관념의 장소로 상정하고 사회학적 역학관계를 분석할 수 없다. 구체적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사회적, 정치적 역사에 대한 탐구가 없으면 새로운 장소의 실현은 점점 더 멀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장소 특정적 미술은 어떤 경우든 구체적인 장소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장소의 개선을 소망하며 장소 특정적 미술의 방향을 모색한 권미원의 모순은 구체적인 장소의 선정을 포기한데서 비롯하였다.


(한국예술연구 제16호, 2017, 279-306쪽.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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