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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미술: 이미지는 어떻게 미술이 되는가?

심현섭



이미지는 어떻게 미술이 되는가? 


심현섭 | 미술평론가



이 질문은 이미지와 미술의 차이를 전제한다. 둘 사이의 차이를 사물(thing)과 대상(object)를 구분한 W.J.T.미첼의 논리를 연장하여 살펴볼 수도 있겠다. 여기에서 미첼은 사물이 갖는 제국성을 따짐으로써 정치적 논의로 확장하지만 아무래도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정치적 관점에서 더 선명히 풀어낸 이는 랑시에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세 가지 ‘식별체제’를 통해 이미지와 미술의 차이를 밝힌다.    


랑시에르는 시대 속에 존재해온 미술을 해석하는 틀로서 세 가지 식별체제를 제시한다. 일정한 시기 특별한 증후가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역사 속에 혼재한다는 점에서 이 식별체제를 연대기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먼저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가 있다. 이때 이미지는 아직 예술로 불릴 수 없는 ‘이미지’다. 이 체제에서 제작물에 관한 판단은 서로 연결된 두 기준의 지배를 받는다. 하나는 이 이미지들은 원본에 충실한가? 또 하나는 그 이미지들은 존재 방식, 즉 이미지를 지각하는 자들의 성격과 도덕성에 어떤 효과를 낳는가이다. 


두 번째 체제인 ‘예술의 재현적 체제’는 윤리적 체제에 머무는 이미지에 조작을 가해 예술이 생산되는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작은 이미지에 가하는 미메시스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현적 체제는 이미지의 윤리적 체제가 중시하는 진리 및 도덕 효과에서 해방하는 과정에서 내적 일관성이라는 규칙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 체제에서 예술가들은 관객들의 쾌락과 감정을 규정하는 규칙을 따라야 했고 그 결과, 자율적 모방 질서는 위계적 세계 질서와 강력하게 이어졌다. 이런 질서 안에서 자율적 모방 질서는 재현할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을 것, 고상한 주제 또는 천박한 주제를 재현하는데 적합한 형태를 구별하고, 작가와 관객을 동일시하면서 결과적으로 작가의 주도권을 지지함으로써 위계가 발생한다. 


세 번째 체제인 ‘예술의 미학적 체제’는 재현적 체제가 보증했던 삼각관계, 곧 미메시스나 재현이라고 불리던 생산적 본성, 감각적 본성 그리고 내적으로 일관된 본성의 매듭이 풀리는 순간에 유발한다. 미학적 체제의 특징은 첫째 재현 대상의 무차별성과 세속화. 둘째 감성의 위계 해체. 셋째 지배와 권력으로부터 분리된 공간. 넷째 포이에시스(제작)와 아이스테시스(수용 감각)의 단절이다,


위의 체제에 의하면 ‘이미지’는 아직 미술이 아닌 그저 원본을 모방하는데 충실하고 그 시대의 도덕윤리를 프로모션하는 기능을 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재현적 체제에 들어서면서 이미지는 작가의 조작을 거쳐 비로소 미술이 되지만, 이 미술은 주제의 선택 등에서 작가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위계질서가 확립된 상태의 미술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이러한 위계를 해체한 미학적 체제에서 비로소 미술은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미학적 체제의 미술의 특징은 무엇보다 포이에시스와 아이스테시스의 단절로서 제작과 해석의 영역을 철저히 분리한다. 제작은 제작이고 해석은 해석일 뿐이다. 

 

여기에는 제작자의 의도를 포함한 포이에시스 환경이 감각적인 것을 지배하는 패권적 상황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랑시에르의 정치 사상이 담겨있다. 그에 의하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을 총칭하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이 권력 중심적인 세력에 의해 지배 당할 때 불평등이 나타난다. 감각적인 것의 지배력은 오늘날 미디어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말하는 것에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 구성원의 삶과 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정치 사상가였던 랑시에르가 후기에 들어가면서 미술에 천착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감각적인 것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도구 혹은 장치로서 미술만한 것이 또 있겠는가? 그런데 랑시에르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미술 해석, 특히 모더니티, 포스트모더니티 같은 식의 역사의식을 기반으로 해서는 이와 같은 미술의 정치적 역할을 발견할 수 없다. 이를 발견하기 위한  랑시에르의 고유한 해석의 틀이 바로 세 가지 식별체제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식별체제 바탕에는 랑시에르의 세 가지 생각이 깔려있다. 첫째, 미술 여부에 관한 최종적인 판단은 제작의 환경(제작자를 포함한) 아닌 해석자(관객을 포함한)가 결정한다. 둘째, 오늘날 사회구조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 상태다. 그리고 셋째, 우리 사회의 감각적인 것의 분할 상태는 억압적이고 불평등하다. 미술에서 정치적 역할을 찾으려는 랑시에르의 연구 자체가 지금의 억압적 상황에 대한 저항의 표출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랑시에르는 지금 우리 사회를 감각적인 것이 부당하게 분배된 ‘치안’의 상태라고 하고, 이를 바로 잡는 행위 및 결과를 ‘정치’라고 한다. 


따라서 이미지가 어떻게 미술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세 가지 식별체제라는 스펙트럼으로 교정하면, 이미지는 어떻게 하여 감각적인 것인 것을 정의롭게 분배하는, 즉 정치적 역할을 하는 미술이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랑시에르의 답은 이미지는 치안의 상태를 바로잡는 정치를 지향하는 작가의 조작이 있을 때 비로소 미술이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치안에 저항하는 정치가 없으면 미술은 없다고 단언한다. 오늘날 자본과 권력과 같은 지배 세력에 타협하지 않는 미술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각적인 것의 정의로운 나눔을 지향하는, 이미지 아닌 미술의 등장이 전시의 무료함을 덜지 모르겠다.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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