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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세상]그래도 의연하게 노래하리

지하철역으로 내려간다. 끝없이 펼쳐진 터미널 상가, 쳐다만 봐도 상처를 잊게 하는 물건들이 목덜미를 잡는다. 이게 아편굴인가 싶다. 축지법을 쓰며 시간도 잊게 하고 공간도 바꿔주는 물건들이 휙휙 덮친다. ‘이민 가방 있어요’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 이민 갈 거라던 사람들이 참 많았지. 1988년 유학 떠나기 전, 남대문에서 이민 가방을 고르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민 가방의 기억은 엄마의 피란길 풍경으로 거슬러간다. 손녀 운동화 한 켤레, 괘종시계, 집문서를 동여매고 산등성이를 넘다가 미군에게 발각된 할아버지의 보따리. 그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느 초가집 마당 멍석 이부자리에서 깨어난 엄마의 머리맡엔 송아지의 배가 드리워져 있었단다. 엄마는 그때, 아침 이슬이 무언지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곤 늘 덧붙였다. 데모하면 전쟁 난다고…. 층층이 줄일 수 있고 늘릴 수도 있는 이민 가방을 바라보며 기억을 챙기다 보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룩한 이 나라의 시공간도 덩달아 주름을 잡는다.

 

그러고보니 비동시적인 것이 동시에 담겨 있는 한반도는 자체가 이민 가방을 닮은 것 같다. 푸른 별 대륙 주머니 같은 곳에서 서로서로 돌아가며 추방을 한다. 평등한 ‘햇볕’보다는 공포에서 안정과 향수를 느낀다. ‘빨리 먹어’가 사랑의 유일한 표현이고, ‘어서 먹어’가 곧 실천인 부모님 세대처럼 지붕을 부수고 복덕방을 사수하며 영원히 ‘잘살아보세’를 외친다. 이웃의 얼굴은 잠재적 범죄자이고 주소는 쓸모가 없으며 외우지도 못할 비밀번호나 만들고 있다. 그렇게 이리저리 이민 가방에 세간살이 꾸겨 넣고 살다 보면 평수별로 노는 아이들을 낳고 앵무새들은 결혼정보업체에서 사랑을 낚을 것이다. 스승은 완장 찬 제자에게 고발당할 것이고, 연민은 위선으로,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빨갱이 짓으로 매도당하고, 노조 탄압은 법조계 하이에나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

숫자의 모양새만 유난히 우아했던 2012년이 지나갔다. 뚱한 표정의 2013년이 철퍼덕 자리를 깐다. 기시감 속에서 밝아온 새해 아침, 소망도 분열을 거듭한다. 애국심으로 증명해야 할 진정성과 반성 타령이 돌림노래를 한다. 슬프지도 않지만 기쁘지도 않다. 거듭되는 불화와 긴장만이 맴도는 이곳은 언제나 고향처럼 ‘익숙한 타향’이니까. 대한민국에 던져진 모두의 인생 여정이 그렇지 않나. 이곳의 불완전한 가능성은 삶이란 여행을 추동하는 유일한 진실이다. 단 한번도 완전한 평화를 모르고 자란 내가 이민 가방을 거꾸로 챙겨 ‘예술하기 좋은 나라’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그래도 13년을 살다 온 낭만적인 파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계속 받는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향수 같은 것이 있다. 그 말을 절감한 선거가 끝났다. 분노와 열정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민주주의가 저만치 또 물러서 있다. 무지한 향수로 점철된 선동의 메시지만 미디어를 장악한다. ‘무지한 스승’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적극적 부재를 행한다면 무지한 향수는 맹목을 부추기고 미래가 들어설 자리를 빼앗는다. “배고플 땐 예술도 사치”라는 민주당 시의원이나 한을 발효시켜 총체적 긍정의 말춤으로 세계를 점령하라는 큰 시인이나 권력 주변에 꼬인 자들의 목소리는 오십보백보다. 민주주의도 배부른 다음에 있는 거라는 무지 앞에서 예술은 또 언제나처럼 일순위로 예산 삭감과 대중의 독재에 바쳐질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항해자들은 단독자 태양보다 무수한 별들 아래에서 길을 찾는 법. 우아하지는 않지만 유연하고 의연하게 이민 가방을 툭툭 쳐가며 ‘체리가 익어갈 무렵’이란 노래를 불러본다. 이민 가방에 담아온 내 인생의 노래다.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다 해도 아픔을 잊지 않고 기리면서 부르는 노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작가의 길을 다시 묻는다.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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