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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데스크] '무감동' 대한민국史박물관

김기철

2005년 독일 베를린 한복판 브란덴부르크문 근처에 들어선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여행객들이 찾는 인기 장소 중 하나다. 나치 정권 붕괴 60주년을 맞아 들어선 이 기념관은 1만9000㎡ 야외 광장에 어른 키를 훌쩍 넘는 회색 돌기둥 2711개를 늘어놓았다. 관람객이 '돌기둥 숲'으로 걸어 들어가면 영문도 모른 채 수용소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은 유태인들이 느꼈을 불안과 공포를 마주 대할 수 있다.

기념관 지하 전시실에선 게토와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한 600만명의 유태인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깜깜한 어둠 가운데 바닥에만 빛이 들어오는 전시실 하나는 엽서와 편지로 가득 채웠다. 수용소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가족과 친지에게 휘갈겨 쓴 사연들이다. 학살당한 유태인들이 끌려가기 전에 어떻게 살았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영상·사진·육성으로 보여주는 전시실도 있다. 마지막 전시실은 학살당한 유태인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하고, 그 인적 사항을 벽에 비추는 '침묵의 방'이다. 기념관을 나설 때면 이름과 얼굴을 모르는 익명(匿名)의 희생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부모이고 자식이자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지닌 이웃으로 다가온다.

몇년 전 찾은 베를린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다시 떠올린 이유는 지난연말 문을 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 광화문 앞 옛 문화관광부 청사를 리모델링한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예술의전당 같은 공공 문화시설이 대중교통이 불편한 도심 속 벽지(僻地)에 있는 것과 비교하면 파격적 대우다. 당초 박물관의 전시 내용을 둘러싸고 우리 현대사의 공과(功過)를 제대로 다루지 않거나 민주화운동을 소략하게 다루는 등 우(右)편향을 우려하는 지적도 있었지만 4·19를 비롯해 유신 반대운동, 1980년 '서울의 봄',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 등 민주화운동의 발자취도 균형감 있게 다뤘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식민지·전쟁·빈곤을 딛고 '기적의 역사'를 만들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린 사람이 보이지 않고 사건과 연표로 나열된 교과서를 넘기는 것 같은 지루한 전시 방식이다. 이를 통해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공산군의 남침을 막기 위한 독립운동가·학도병·군인들의 수많은 희생, 파독(派獨) 광부·간호사와 중동 건설 근로자 등 산업화의 밑거름이 된 사람들 그리고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몸 바친 이들의 헌신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적병(敵兵)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고 쓴 중학생 학도병의 편지나 김치 담글 돈만 남기고 고국의 가족에게 월급 전부를 송금했다는 파독 광부·간호사의 눈물 어린 사연 한 줄이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법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건을 나열하는 구태의연한 전시로는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기도, 공감을 끌어내기도 어렵다.

혈세(血稅) 448억원을 들여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유치원생들의 체험학습장 정도로 쓸 게 아니라면 발상을 바꿔야 한다.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몸 바친 '이름 없는 영웅'들의 피와 땀을 박물관에서 만나고 싶다.


- 조선일보 2013.01.09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1/08/20130108023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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