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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동 유적의 ‘관리’

최영창

1995년 여름 문화재 담당을 처음 맡은 뒤 국립광주박물관의 광주 신창동 유적 발굴 현장을 찾은 바 있다. 1992년 1차 조사에서 확인된 저습지 유적을 집중 발굴한 결과, 기원전 1세기 목칠 제품을 생산하는 공방의 확인과 함께 발화구와 신발골, 부채자루 등 다양한 목제 유물이 쏟아졌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였다. 발굴조사의 현장책임자였던 조현종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관(현 국립광주박물관장)으로부터 막바지 작업 과정에서 출토된 농경의례와 관련된 파문(巴文·바람개비문양)칠기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인 저습지 발굴이 처음 시도된 광주 신창동 유적은 1990년대 문화재 담당 기자들이 가장 주의를 기울인 현장 가운데 하나였다. 155㎝의 벼껍질 압착층을 비롯, 베틀과 현악기, 발화구, 신발골, 수레바퀴 등 우리나라 최초(最初)와 최고(最古), 최대(最大)를 자랑하는 유물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최초·최고·최대’를 일컫는 이른바 ‘3최(最) 기사’는 문화재 또는 학술 담당 기자들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문제이지만 광주 신창동 유적 출토 유물에 있어서는 예외였다.

이에 따라 개별 현장에서 하나씩 나왔더라면 훨씬 더 주목받았을 유물들이 빛을 못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1997년 출토된 베틀 부속구로 날줄과 씨줄이 치밀하고 고르게 짜지도록 하는 도구인 바디는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고 한병삼 문화재위원이 발굴 현장에서 국보감이라고 극찬했던 유물이다. 하지만 여론의 관심이 며칠 뒤에 출토된 현악기에 쏠리면서 기대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광주 신창동 유적은 원래 1963년 고 삼불 김원용 전 서울대 교수가 옹관묘 53기를 조사한 뒤 30년 동안 잊어졌다. 구불구불했던 국도 1호선의 직선화 공사를 계기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저습지가 찾아지고 복합 농경 유적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1992년부터 2011년까지 11차례나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1990년대는 발굴성과로, 2000년대 이후에는 출토유물에 대한 연구성과로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광주 신창동 유적의 특징이다. 발굴 당시에는 의식용 목제품으로 추정했지만 연구결과 수레바퀴 부속구로 밝혀졌거나 대형의 괭이가 따비(쌍날따비)로 확인된 게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말 개막한 사적 지정 20주년 기념 특별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한국 최고의 비단도 1997년 수거된 유적의 토양을 물체질해 얻은 작은 천조각에 불과한 것이었다.

국내 저습지 유적 발굴 붐의 기폭제가 된 광주 신창동 유적은 지난 20년 동안 발굴 및 연구 성과로 인해 2000년 전 영산강변 고대사회의 실상을 보여주는 콘텐츠의 산실로 거듭났다. 국내의 유수한 유적들 가운데서 광주 신창동 유적 같이 장기 계획 아래 발굴이 진행되고, 출토된 유물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사례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학예사 시절부터 저습지 발굴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등 광주 신창동 유적에 젊음을 바친 조현종 관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오는 3월 3일까지 개최될 예정인 ‘신창동-2000년 전의 타임캡슐’ 특별전에 가면 광주 신창동 유적의 실체와 이곳에서 20년의 세월을 함께 한 고고학도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다.

광주 신창동 유적은 질과 양적인 측면에서 우리나라 최고를 자랑하지만 앞으로의 전망이 장밋빛인 것만은 아니다. 유적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호남고속도로의 확장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장기적인 보존 및 활용 대책이 필요한 실정이다. 광주 신창동 유적의 가치와 중요성이 미래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때다.

- 문화일보 2013.01.17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1701033030074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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