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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과 여백 : 미술] 부산공간화랑의 길

김만석

1975년 마른 몸에 선한 인상을 가진 사내가 '공간화랑 다실'을 광복동에 개업한다. 사내는 화랑과 다방을 겸한 공간을 열어 팔리지 않을 그림들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차를 팔 계획이었다. 1975년은 다방의 수가 점차 증가해 경쟁이 훨씬 심해진 시기였지만, 사내가 품은 꿈과 희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3년여의 시간 동안 화랑과 다실을 겸하면서 전시 작품과 차를 열심히 팔았지만, 그리 큰 수익을 남기지는 못했다. 사내의 희망과 달리 그림은 종종 팔리기도 했지만, 오히려 '차' 값을 제대로 받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공간화랑 다실'을 오가는 주 고객은 미술인이었고, 이들은 대체로 외상으로 차를 먹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사내도 그 돈을 악을 쓰며 받아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

사내는 당시 잡지사 기자들이 부산의 1세대 작가에 속하는 양달석의 그림이나 현대문학 표지로 사용되었던 이중섭, 천경자의 그림을 팔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경영 악화의 가장 큰 이유였던 외상 찻값을 도저히 감당하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이후 여러 공간을 전전하다 마침내 서면에 부산공간화랑이 터를 잡고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사내는 본격적으로 화랑을 경영하면서 을씨년스러운 시대를 아주 고통스럽게 관통해 왔다. 그의 내밀한 이야기에 따르면 부마항쟁 시기 서면 한복판에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어느 청년의 머리를 내리치는 것을 눈앞에서 보면서 떨리는 분노를 멈추는 게 쉽지 않았다고 했다. 80년대 내내 누구나 그 떨리는 분노를 가눌 수 없었을 터. 그 와중에 예술적 공간을 꾸리고 유지하고 영위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사내는 결코 화랑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1989년 부산청년미술상을 제정하여 24년째 운영 중이고, 결핵을 앓아 생사를 오갔던 1998년 소장하던 작품을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하면서 예술 작품을 공공화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는 부산시립미술관에서부터 경남도립미술관, 밀양박물관, 부산박물관 등지로 기증을 확대했다.

사내와 부산공간화랑은 역사적으로도 그러하고 상징적인 차원에서도 부산미술의 큰 자양분이 되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부산공간화랑 서면점에서 전시는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지난해 7월 즈음 '서면점은 경영상의 문제로 폐쇄하기로 결정했다'고 사내는 덤덤하게 말했다. 문화의 지리적 측면 때문에 해운대점만을 남겨 둔다고 했지만, 동보서적이 그러했듯, 서면의 상징 좌표 하나가 또 사라진 것은 여간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난 23일 공간화랑 해운대점에서 제24회 '부산청년미술상' 심사를 심사위원 다섯 명과 다섯 시간 동안 진행하면서, 힘겹게 가꾸어 온 부산 미술이 당면한 현실적인 위기를 이전보다 훨씬 격렬하게 자력으로 넘어가야 하는 시기가 왔음을 또다시 문득 깨닫게 되었다. 미술시장 열풍이 잠잠해진 이 시기, 미술인들은 (이전에도 그러했지만) 보다 더 절박해지고 힘겨워진 살풍경을 그 누구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자력으로 넘어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자발적 힘들이 '옆'을 만나고 '앞'과 '뒤'를 결속하게 만들 것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한 시대의 문턱을 넘고 있다. 


- 부산일보 2013.01.28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3012600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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