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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융성의 조건

손영옥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60, 7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는 또 다른 나팔소리가 크게 울렸다. 민족문화 창달의 구호였다. 당시 정부는 정권의 유지와 정당성을 위해 경제적으로는 산업화를, 문화적으로는 민족문화를 내세웠던 것이다. 그 영향으로 미술계에 나타난 게 ‘한국성 찾기’다. 

그때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 5·16민족상 이사장의 제안과 주도 아래 대대적인 민족 기록화 사업이 진행됐다. 그 결과 곳곳에서 민족영웅과 순국선열의 희생을 기리는 그림이 그려졌고 동상이 세워졌다. 미술 현장에서는 한국적인 소재와 주제가 급부상했다. 

서구를 추종하듯 추상이 지배하던 화단에는 갑자기 색동이나 단청 창호문 등 전통 문양이 인기 소재로 등장했다. 전통 재료인 한지도 사랑받기 시작했다. 화가들의 우리 것 찾기는 특히 70년대 후반 단색조 회화라는 하나의 유파를 탄생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논란이 없는 건 아니나 중간색 톤의 가라앉은 단색 화면은 동양의 정신성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이 유파는 한국의 대표적 미술 브랜드로 지금도 해외에 세일즈되고 있다. 

헌정 사상 첫 부녀 대통령이 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25일 취임식에서 문화융성을 경제부흥, 국민행복과 함께 3대 국정과제로 제시했다. 5년 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 내세운 5대 국정지표에 문화 관련 언급이 빠졌던 걸 감안하면 이례적이다. 그만큼 문화가 21세기 주류 담론이 되고 있는 현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겠다. 특히 문화융성 구호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로 대표되는 한류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시점에 나온 것이라 더욱 반갑다. 

이를 개인사와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지난 1월 중순, 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정부부처 업무보고 첫날 순서에 문화재청이 포함돼 눈길을 끈 적이 있다. 이를 두고 박 대통령이 성장기 키운 문화유적 사랑이 한몫 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70년대 중반 경주 황남대총 발굴 당시 박 전 대통령이 지금의 대통령이 된 딸을 데리고 현장을 격려 방문했다는 일화도 들린다. 그런 게 계기가 되어서인지 박 대통령은 야인 시절 전국의 문화유적을 찾아 답사여행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유년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든, 다른 배경이 있든 딸 대통령이 아버지 대통령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정책은 돈이라는 사실이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운동처럼 번진 민족문화 창달의 바람은 실제로 예산 투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1차 문예중흥 5개년 계획(1974∼78년)에 따라 문화정책에 집행된 예산 가운데 70% 이상이 국학 진흥, 전통예능, 문화재 정비 등 전통문화 부문에 투자됐다. 

물론 60, 70년대 미술계를 지배했던 한국성 찾기를 두고 ‘시대가 강요한’ 문화라는 비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돈이 투입되었기에 구체적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건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다. 

다행히 박근혜 정부도 문화 부문 공약으로 문화 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의 1.2%에서 2017년까지 2%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2% 문화 재정’에 의구심을 보내는 시선이 적지 않다. 말하자면 이는 실천의 문제다. 

이명박 정부에서 문화재 구입 예산은 해마다 줄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일제 강점기의 문화재 발굴 기록을 재정비하는 10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일제가 부실 발굴 후 메워버린 유적의 재발굴은 예산 부족으로 엄두도 내지 못한다. 새 정부가 전임 정부와 어떤 차별화를 만들어낼지 구체적 현장을 통해 목격하고 싶다.

-국민일보2013.03.01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947099&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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