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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문화 융성'은 누가 어떻게 하는가

김광일

새 대통령 '21세기는 문화가 국력' 우리 상품도 문화적 격조 높아져
비싼 값 받기까진 얼마나 걸릴까…문화는 산업이면서 정책이지만
고속 성장 불가능한 집단적 교양, 문화 융성 실마리 찾는 것이 과제

문화는 뼛속까지 산업이다. 문화는 돈이다. 아닌 척하면 곤란하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14~15세기 일어난 문예대부흥은 금융업으로 큰돈을 번 메디치 가문이 뒤를 밀어주어 가능했다. 라파엘·미켈란젤로·레오나르도 다 빈치·단테·보티첼리 같은 피렌체의 예술 거장들이 오로지 예술신(神)의 기름 부음만 받아 불멸의 창작혼을 태운 건 아니다. 메디치 가문은 유럽 전체 부(富)의 절반을 갖고 있었다. 문화가 전쟁을 먹고산 적도 있었고, 혁명의 어깨 위에 무동을 탄 적도 있었지만 돈 떨어진 문화는 금세 쇠락했다.

새 대통령의 취임 연설은 4024글자였다. 문화 융성 부분은 412자였다. 대통령은 전체 연설 무게의 3분의 1쯤을 문화 융성에 두어 “21세기는 문화가 국력”이라고 했다. 개개인의 상상력이 콘텐츠이며, 한류 문화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고, 5000년 문화유산이 바탕이 됐다고 했다. 국민에게 문화가 있는 삶을 누리게 하고, 문화로 사회 갈등을 치유하며, 지역·세대·계층 간 문화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했다. 여러 장르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고 문화와 첨단 기술을 융합한 콘텐츠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했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다. 앞선 대통령들한테 들어보지 못한 비전이다. 그러나 일부 고급 문화를 더 고급스럽게 만들도록 도와야 하는지, 아니면 다소 품질이 낮은 중급 문화라도 더 넓게 퍼지도록 힘을 보태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싸구려 공연을 100번 하는 것보다 세계 수준의 공연을 한 번 하는 것이 훨씬 값어치가 있다는 공론이 합당한지 따져봐야 한다. TV 드라마에만 빠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다채로운 문화 산품(産品)을 고루 즐기게 하고, 마침내 문화적 교양이 넘쳐 흐르게 된 그들이 만들어내는 물건도 문화적 격조가 높아져 국내외 구매자들에게 비싼 값을 받고 팔 수 있게 되기까지는 얼마나 오랜 시간 선(善)순환 구조의 나선원을 그려 나가야 할지 알 수 없다.

말 안장가죽을 무두질하던 유럽 직공이 만든 여성용 가방을 500만원 주고 사는 행동과 국내 장인이 만든 명품 가죽 가방을 50만원 주고 사는 행동 사이에서 구매자는 왜 10배나 나는 금액 차이를 순순히 받아들이는지, 라벨에 붙은 그 무엇이 우리 문화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한다. 국제 공연 시장에서 일정 평가를 끝낸 라이선스 뮤지컬을 앞다퉈 들여온다면 더 이상 못 살겠다면서 창작 뮤지컬이 커 나갈 수 있도록 스테이지 쿼터제를 만들어 달라고 하소연하는 공연계의 속사정도 살펴봐야 한다. 제3세계권에 속하는 주변부 언어를 갖고 작품을 쓰고 공연물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무런 콤플렉스 없이 세계의 중앙 무대에 올라서는 날이 이미 왔는데도 우리는 첫 노벨문학상을 언제쯤 타느냐고 물어야 하는 속사정도 안타깝다.

문화는 산업인 동시에 행정이다. 문화는 정책이다. 문화는 예술인에게 자유와 동의어지만 문화만큼 강고한 제도와 인습의 틀 속에 갇힌 것도 없다. 그러니까 문화는 표현의 한계를 건드리는 불온한 작품들이 서로 부딪치는 세계인 동시에 성숙한 민주 시민이 갖춰야 할 집단적 교양 같은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가 30년 혁명이었다면 문화는 100년 농사다.

열차나 자동차를 타고 조국의 국경을 넘어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에게 분단국 트라우마와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넘어설 브랜드 파워는 결국 미래와 문화가 좌우한다. 무역·관광·외교에서 문화가 깃든 국가 브랜드는 정신적·물질적 신뢰도를 높이는 핵심 지렛대 역할을 한다. 문화를 인위적으로 융성하게 만들 수 있는가. 온 나라가 주요 장관들 없이도 굴러가는지 실험해보자고 벼르는 것 같은 마당에 문화 융성의 실마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난감하다.

-조선일보2013.03.05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04/20130304008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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